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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ive Interactivity and Reflexive Intermediality: Focusing on the Neflix Film

선택의 상호작용성과 성찰의 상호미디어성: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를 중심으로

  • 김무규 (부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 Received : 2021.07.02
  • Accepted : 2021.08.05
  • Published : 2021.08.28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formal characteristics of , which has been screened on Netflix since 2018. This film can be considered an interactive narrative because it gives viewers the opportunity to select their own narrative forks which lead to various endings. However, it also limits viewers' freedom of interactions in many ways, resulting in the pessimistic narrative world of series. In this contradictory situation, the conflict between the user's selectability and the narrator's authoriality emerges. And this collision gives rise to a complex form in which nonlinear interactive and linear narrative forms blend together. It can be understood as a form of self-reflection, such as forms of the metalepsis and breaking the fourth wall. In this paper, this particular form will be regarded as a sort of reflexive intermediality, i. e. the form for media reflexion.

본 논문의 목적은 2018년부터 넷플릭스에서 상영된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의 형식적 특성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콘텐츠는 시청자에게 사건 진행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따라 각기 다른 결말이 나타나기 때문에 일종의 상호작용적 서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상호작용이 제한되는 경우도 있어서 수용자는 선택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또한 여러 결말에서 공통적으로 <블랙 미러> 시리즈에 전형적인 테크놀로지 비판의 주제가 나타나는데, 그래서 <밴더스내치>를 전통적 서사의 일종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서사의 상황 때문에 사용자의 선택 가능성과 작가의 서사적 권위는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충돌로 말미암아 복잡한 형식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비선형적 상호작용성과 선형적 서사 형식 사이의 중간적인 것이며, 혹은 두 가지가 융합된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을 메타렙시스 또는 제4의 벽을 파기하는 형식과 같은 자기반영의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특수한 형식을 통해 성찰적 상호미디어성, 즉 일종의 융합 형식을 통한 미디어의 자기성찰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Keywords

I. 서론

본 논문의 목적은 넷플릭스에서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리즈의 하나로 2018년 상영되기 시작한 <밴더스내치>(Bander snatch)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 콘텐츠가 지니고 있는 특수한 형식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밴더스내치>는 수용자의 선택, 혹은 참여로 사건의 진행이나 서사의 결말이 결정되기 때문에, 수용자에게 상호작용의 기회가 부여되는 ‘상호작용적 서사’로 볼 수 있다. 콘텐츠의 상영 도중에 주인공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하는 순간, 그것은 시청자에게 질문형식으로 제시되고, 답변에 따라 서사의 사건이 진행된다.

시청자는 그 질문에 자유롭게 답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제약으로 시청자는 이미 사건 진행이 결정된 것과 같은 느낌을 갖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제작자인 맥린(Russell McLean)은 어느 인터뷰에서 심지어 “당신은 스스로 결말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는가? 사실은 <블랙 미러>가 당신의 결말을 결정한다”라고 말하였다[1]. 수용자의 선택이 실은 착각일수 있다는 제작자의 말을 생각해보면, <밴더스내치>를단순히 상호작용적 서사로 간주할 수 없고, 무엇인가 다른 관점에서 이 콘텐츠를 고려해야 한다. <벤더스내치>는 상호작용의 자유를 누리려는 수용자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는 것처럼 가장하지만, 결국 몇 가지정해진 결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몇 가지 결말에서 인간이 테크놀로지에 종속되는 비극적 결말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상호작용의 게임도 아니고 사건의 진행이 결정되어 있는 서사영화도 아닌 이 콘텐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게임은 능동적 상호작용성의 의미가 있고 영화는 감상과 수용의 의미가 있지만, 그 중간적인 형식의 콘텐츠인 <벤더스내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 논문은 다음의 사항들을 검토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상호작용적 콘텐츠로서의 <밴더스내치>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둘째로, 그 선택의 제약이 발생하여 결말이 결정되는 상황, 소위 말해서 ‘폴드백 스토리’(foldback story)의 면모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형식적 특수성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셋째로 <밴더스내치>의 인물과 그 인물을 통제하려는 시청자 양측 모두 자신들의 이야기가 폴드백 스토리임을 깨닫게 되며, 그 순간에 <밴더스내치>는 자기반영성, 혹은 자기 지시 성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일반적인 자기반영과는 다른 특별한 경우임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넷째, 마지막으로 그 형식적인 문제를 미디어 성찰을 위한 일종의 융합형식인 상호미디어성(intermediality)의 개념으로 파악해볼 것이다.

Ⅱ. 본론

1. 상호작용적 서사로서 <밴더스내치>

<블랙 미러> 시리즈의 여러 에피소드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여러 에피소드들이 대체로 인간과 디지털 기술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밴더스내치>에도 그러한 비판적인 모티브가 담겨있다. 그리고 서사적 전개가 미리 결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선택에 따라 그것이 달라지는 상호작용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이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 경우, 그 선택은 시청자가 하게 되어, 그에 따라 사건의 갈래가 정해진다. 그런 선택의 지점은 모두 40 차례 정도 있다.

<밴더스내치>의 배경은 1984년이며 컴퓨터 게임의 개발에 소질이 있는 소년, 스테판 버틀러(Stefan Butler)가 주인공이다. 스테판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정신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정신과 의사와 자주 상담을 하며, 또 아버지와의 관계도 불편하다. 그는 어느 날 터커소프트사에 자신이 개발 중인 게임을 소개하고, 게임의 완성과 출시를 권유받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명 개발자인 콜린 리트먼(Colin Ritman)을 만나서 그와 어울리게 된다. 그러나 스테판은 게임의 완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며, 그럴수록 그의 정신적인 문제도 심각해지게 된다.

이렇게 설정된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하며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의 전개는 영화를 관람하는 시청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그 다수의 선택에 따라 중요한 다섯 가지, 크게 보아서 열 가지 정도의 결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정신과 의사인 헤인즈 박사(Dr. Haynes)와 면담을 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콜린을 따라가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 이후에 매우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며 결말도 달라진다. 콜린과 관계된 이 선택은 이후 전개와 결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상호작용으로 서사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넷플릭스로 볼 수 있는 많은 콘텐츠와 다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상호작용적 영화, 혹은 디지털 서사로 분류할 수 있다. 상호작용적 콘텐츠에 대해 그간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2]. 이 콘텐츠들 가운데 특정한 서사가 하나의 미디어 내부에서 수용자의 선택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는 선택의 범위가 특정한 미디어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데일리(Kristen Daly)의 ‘시네마 3.0’ 개념이 그것이며[3], 또한 젠킨스(Henry Jenkins)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 개념도 여기에 해당된다[4]. 젠킨스의 제안은 매우 흥미롭다. 특정한 작품이나 미디어의 범위를 넘어서는 스토리세계(storyworld)가 있다는 그의 착안과 아울러 스토리세계가 특정한 작품이나 미디어를 넘어서는 관객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생각은 전통적인 서사와 작품 개념을 상당히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이다[5].

2. 선택의 제약, 혹은 폴드백 스토리

<벤더스내치> 전체에서 선택의 물음이 40차례 정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서사의 갈래와 결말의 유형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여겨진다. 많은 선택의 기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몇 가지 결말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선택이 전체적인 사건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 그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어떤 시리얼을 먹을 것인가 혹은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인가와 같은 선택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통합체와 관련된 선택이 아니라 계열체와 관련된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있다. 특정한 선택의 결과가 이전의 사건으로 흡수되어 반복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선택에 따라 어떤 결말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곧 주인공인 스테판이 아침에 일어나는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서 마치 그것이 하나로 연결된 영화처럼 생각된다. 이렇게 갈래들이 계속 병렬되어 이어지는 영화들은 예전에도 제작되었는데, <롤라런>(Lora Rennt, 1999) 이나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 2004) 등이 그것이다. 그것을 퍼즐 영화(puzzle film), 혹은 마인드 게임 영화(mind game film)라고 한다[6]. <밴더스내치>는 퍼즐 영화나 마인드 게임 영화와 유사하면서도 그것에 속한다고 보기에도 어려운데, 왜냐하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는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분명한 선택의 기회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림 1]은 게임개발사가 스테판에게 회사에서 작업을 하도록 권유하는 장면이며, 그것의 결정이 시청자에게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병렬 적이라고 하더라도 시청자들의 선택에 따라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는 퍼즐 영화와 다르다. 아마도 퍼즐 ‘영화’나 ‘상호작용적’ 영화의 중간 정도로 보는 게 온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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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시청자의 선택을 통한 상호작용

과거에도 상호작용적 콘텐츠에 선택의 기회가 제한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최초의 상호작용적 영화라고 알려진 라두츠 친체라(Radúz Činčera)의 <키노아우토마트>(Kino automat, 1967)도 관객에게 대략 여섯 차례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러나 모두 같은 결말로 귀결된다. 나중에 친체라는 당시에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객에게 충분한 선택의 자유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밴더스내치>가 충분한 상호작용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다른 맥락으로 파악해야 한다. 제약 자체가 의도적이면서도 그것이 전체 내용에서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밴더스내치>는 보통의 상호작용적 서사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결말이 제한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영화의 중간 부분에서도 시청자는 게임을 할 때처럼 자유롭게 상호작용을 수행할 수 없다. 달로이아(Adriano D’Aloia)는 그 상호작용의 제한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로 그는 다른 넷플릭스 콘텐츠와 달리 타임라인에서 앞으로 혹은 뒤로 점프하는 것에 제약이 있다고 하였다. 그 결과로 사건들의 배열은 대체로 정해져 있으며 다른 콘텐츠와 비교하여 오히려 시청자가 원하는 정확한 지점으로 이동할 수 없다.

둘째, 선택의 순간이 10초 경과되면 다음의 사건은 자동으로 결정된다(스테판이 만들고 있는 게임 <밴더스내치>도 또한 10초의 선택 시간이 주어진다).

셋째, 많은 선택은 특정한 경로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한 선택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되돌아간 결정으로 인해 대체로 영화의 플롯이 비합리적이며 비극적인 전개로 귀결되는데, 그래서 “모든 합리적인 결정은 사실상 갑작스런 결말에 이르도록 한다. 그것은 마치 오답을 수정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결말에서 스테판은 체포되어 투옥된다거나, 콜린이 실종되는 것과 같이 인물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고, <블랙 미러> 시리즈의 염세적이며 기술비판적인 세계관이 계속해서 유지된다[7].

따라서 이러한 제약은 단순한 상호작용의 폭이 작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가 많은 것을 먼저 정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택의 가능성 들이 제공되는 것처럼 꾸며놓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맥스위니와 조이(Terence McSweeney & Stuart Joy)에 의하면 <밴더스내치>의 꾸밈은 일종의 폴드백스토리로 볼 수 있다[8]. 그것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 브랜칭 서사(branching narrative)와 달리 유저의 상호작용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는 서사를 말한다. 예를 들어 폴드백 스토리를 지닌 컴퓨터게임에서 게이머는 자신이 사건의 진행을 통제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지만, 특정한 사건진행을 피할 수 없고 결국에는 특정한 결과를 피할 수 없다. 맥스위니와 조이가 폴드백 스토리를 언급한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밴더스내치>의 상호작용적 서사의 제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혹은 시청자만 속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테판도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된 결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신체가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일도 경험한다. 그렇게 스테판과 시청자의 사정은 비슷하다. 상담자인 헤인즈 박사가 스테판에게 하는 말도 <밴더스내치> 관객의 상호작용에 대한 코멘트처럼 들린다. 그녀는 스테판에게 “과거는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더라도, 우리는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뒤늦게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을 다르게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화의 결말 대부분은 스테판을 통제하는 요인과 그를 속이는 무언가가 밝혀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결말에서 그가 경험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은 영화(혹은 드라마)의 한 부분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가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결말에서 스테판은 출생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그리고 정신과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어떤 실험의 대상자였음이 밝혀진다. 그가 통제받고 있다는 느낌과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은 그렇게 명백한 사실로 판명된다. 또 다른 결말에서는 그를 통제하고 있는 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임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지금 넷플릭스를 통해서 스테판의 결정에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스테판 스스로 깨닫게 된다. 스테판의 깨달음으로 시청자도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스테판을 통제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3. 넷플릭스의 자기반영

상호작용이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하면, 다음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는 마치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처럼 하면서도 결국 그것을 억제하는 <밴더스내치>의 특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 제약 때문에 나타나는 상호작용적 서사와 전통적 서사의 중간적인 형식, 즉 두 가지 유형의 콘텐츠가 서로 융합된 것과 같은 형식은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다. <밴더스내치>를 대하는 수용자는 그에게 제공되었다고 믿었던 상호작용이 통제를 받게 되면, 결국 수용자는 자신이 의도했던 상호작용의 행위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콘텐츠가 상호작용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예를 들어 그 콘텐츠가 누군가에 의해(예를 들어 넷플릭스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 결말에서 <밴더스내치>는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서사의 진행은 폴드백 스토리로 볼 수 있지만, 보통의 게임과 달리 선택을 해도 유사한 결말로 귀결된다는 점을 시청자에게 분명하게 주지시켜준다. 그것은 서사 내부의 인물인 스테판이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다른 외부의 힘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점에 근거하여 <밴더스내치> 의 자기반영(self-reflexion)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술작품이 다른 대상을 반영하기보다 예술 그 자체에 관련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을 자기반영성이라고 하는데, 자기반영성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다. 여기서는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밴더스내치>는 여러 가지 기술비판적인 주제를 다루며 또한 그로 인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게 때문에 자기반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정보기술의 일종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또한 극 중 인물들이 겪는 사건도 그와 관계되어 있다. <밴더스내치>의 여러 가지 결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 효과이다. 그 맥락에서 <밴더스내치>는 특정한 사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보다 그와 반대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며, 혹은 경우에 따라 감시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시청자의 선택으로 귀결되는 상이한 결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보았을 때, <밴더스내치>는 뉴미디어를 통해 뉴미디어의 문제 자체를 고찰하는, 혹은 넷플릭스 콘텐츠를 통해 넷플릭스를 성찰하는 자기반영적 영화로 간주된다. 남명희는 이에 대해 <밴더스내치>의 결말을 “모든 갈등의 원인이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의 조종 때문이라고 전개되는 자기반영적 결말”이라고 적절히 표현하였다[9].

그러한 비판적 자기반영은 비단 서사되는 사건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다른 면모를 지닌 자기반영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그 순간에, 스테판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스테판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에 나타나는 자기반영을 말한다. 사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경로로 흡수되고, 또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합리적인 선택이 거부되는 일이 빈번하며 그것은 마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위해 오답을 수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 메시지의 초점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스테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혹은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넷플릭스에 맞추어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콘텐츠를 수용하는 상황 그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인지된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기반영보다 더 적극적인 자기반영, 다시 말해서 ‘바로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영화 <밴더스내치>를 관람하는 우리 시청자 스스로를 반영하는 경우이다. 특히 이러한 자기반영성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네 번째 벽을 파기하는 것(breaking the fourth wall)이다. ‘제4의 벽’이란 연극과 같은 공연 예술작품에서 파기될 수 없는 장벽, 즉 연극적 상황과 관객의 공간 사이의 장벽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의 파기는 연극의 진행을 멈추게 하고 관객이 연극의 내용에 대해 느끼는 환영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밴더스내치>에서 이렇게 환영이 깨지는 일은 빈번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이야기 갈래가 결말을 맺고 또다시 스테판이 아침에 일어나는 장면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때의 새로운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가 결말을 맺고 그것이 다시 되돌아온 이야기라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콜린은 두 번째로부터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스테판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며, 또는 스테판(혹은 시청자)이 한 번 선택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콜린의 말에서 제4의 벽을 파기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극중 인물인 콜린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 관객을 의식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자기반영은 서사 안에서 머무르는 자기반영, 즉 비유적인 자기반영과는 달리 수용이 발생하는 그 시점을 반영한다.

앞에서 언급한 예는 콜린이 스테판에게 말하는 경우이지만 어느 곳에서 스테판은 <밴더스내치>를 보는 시청자와 대화를 한다. 그것은 더욱 분명하게 제4의 벽을 파기하는 효과이며, 더 자세히 말하자면 메타렙시스(metalepsis)이다. 예를 들어 어느 갈래의 이야기에서 스테판이 자신을 조종하는 자가 누구냐고 외치며, 이후에 [그림 2]에서처럼 모니터에 “나는 너를 넷플릭스에서 보고 있다. 그것은 21세기의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다”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이것은 불가능한 영화 인물과 관객의 대화이다. 윤혜영은 서사 중간에 나타나는 메타렙시스로 인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가 나타난다고 하였다[10]. 왜냐하면 그 대화로 인해 시청자는 더 이상 영화의 내용에 몰입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그것에 거리를 두면서 수용의 상황에 대해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밴더스내치>의 ‘제4의 벽 파기’와 ‘메타렙시스’로 인해 자기반영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영되고 있는 자기는 미디어 콘텐츠 전체나 수용자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시점과 지점에서 <밴더스내치>를 시청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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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인물과 관객의 대화를 통한 자기반영

4. 상호미디어성과 자기성찰

앞에서 자기반영성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미디어나 기술 전체를 주제로 하여 그것을 반영하는 경우와 여기 지금 <밴더스내치>의 수용이 발생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경우이다. 이 두 가지 자기반영 성은 서로 다르며, 특히 두 번째의 자기반영성 때문에 이 작품의 자기반영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그리고 그 자기반영은 상호작용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도록 한 콘텐츠의 구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키르히만(Kay Kirchmann)은 후자의 경우를 자기 반 영성이 아닌 자기지시성(self-reference)이라고 하였다. 그는 특수한 자기반영성을 자기지시성으로 좁게 규정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상실의 경험을 투영하는’ 현대 예술과 영화의 특성을 고려하였다[11]. 이렇게 자기반영이 단순한 표현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숙고를 불러일으키는 경우에, 그것을 성찰(reflexion)이라고 개념화하는 경우도 있다[12]. 키르히만이 지적한 대로 현대 예술은 대상을 표현하는 것보다 표현하는 것 자체를 반성하는 것에 고민하였는데, 그 반성을 위해 예술적 형식을 고안하는 것도 현대 예술의 중대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왜냐하면 정보를 전달하거나 사건을 서술하는 일과 같은 보통의 소통상황에서 그 성찰이라고 불리우는 반성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찰을 수행하면 정보전달이나 사건서술과 같은 미디어의 기능은 작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예술형식에 의존해야할 만큼 그것은 특수한 표현방식을 필요로 한다.

키르히만이 자기지시성이라고 말하는 좁은 의미 의자 기반 영성, 즉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자기반영성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 우리들 수용자에게 충격이나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보통 상호작용의 경우, 내가 통제하는 어느 인물과 나의 사이에는 안정된 간격이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은 매끄럽게 진행되지만, <밴더스내치>에서 체험할 수 있듯, 메타렙시스 상황에서 상호작용은 제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게임의 아바타가 자신을 만든 게이머에게 이제 그만 게임을 중지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게임의 상황과 성찰의 상황은 병존할 수 없다. <밴더스내치>를 보면 뉴미디어의 신화라고 불리우는 상호작용성의 성립 가능성과 그것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달로 이 아는 그것을 “내가 테크놀로지의 위험을 의식하게 되었고, 다이어그램과 알고리즘의 덫에 빠진 희생자였음을 발견한다”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넷플릭스의 알고리즘 사용을 정당화하면서도 동시에 묵인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라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있다고 판단된다.

<밴더스내치>가 게임형식과 서사형식이 혼합된 형식을 활용한 목적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중간적인 형식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수용자는 스스로의 미디어 활용에 대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명희는 중요한 지적을 하였는데, 그것은 “전통적 내러티브와 디지털 내러티브의 조화”를 말한다. 즉, “두 내러티브의 결합은 이화 효과를 일으키고 극의 재미를 배가했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청방법이 게임처럼 개인화되었다는 점을 활용했으며, 자기반영성을 이용해서 상호작용성 체험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설명하였다. 두 내러티브의 결합은 상호작용적 서사를 기대했던 수용자들에게 상호작용의 축소를 의미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의미의 ‘통제 서사’가 활성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의 시도, 자세히 말하자면, 상호작용을 축소하고 전통적 서사를 활성화시키는 형식적 실험을 통해서 언급했던 비판적인 성찰이 가능하게 된다. 달로이아도 이러한 상황이 <밴더스내치>에서 핵심적이라고 하였다. 즉 “관객이 작가라는 환상과 텍스트의 효과적인 권위 사이의 긴장”, 그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이며 그렇게 영화는 자기반영적이라고 하였다. 달로 이 아는 그 형식을 “긴장”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상호작용적 협력과 해석적 협력(interactive and interpretative cooperation), 혹은 수행적 협력과 심리적 협력(performative and psychological cooperation)” 사이의 긴장을 말한다. 실제 수행을 통해 가시적 결과가 나타나는 상호작용적 서사와 피동적으로 수용하는 전통적 서사의 긴장을 말한다. <밴더스내치>의 특별한 형식을 “결합”과 “조화”로 표현하든, 혹은 “긴장”으로 표현하든 두 가지 서로 다른 서사 방식이 하나의 작품에서 공존하고, 그 결과로 시청자들이 어떠한 자기지시의 인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식으로부터 성찰의 가능성이 생성될 수 있다.

이 콘텐츠는 전반부에서 주로 일반적인 서사의 형식에 수용자의 선택 가능성을 부여하여 게임의 특성을 혼재하도록 하였다. 특정한 지점에 수용자의 의도대로 사건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였고 그렇게 해서 상호작용적 서사가 성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호작용적 서사의 관점에서 <밴더스내치>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게임에서 핵심적인 자유로운 선택과 참여가 제한되고 이미 결정된 것 같은 폴드백 스토리의 면모가 특히 중반 이후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그것은 확실해진다. 이러한 게임과 서사의 두 이질적인 미디어의 특성이 하나의 콘텐츠에 병존함으로써 수용자는 게임이나 서사에 몰입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수용 행위나 상호작용 행위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미디어 성찰이 어떠한 형식적 방법으로 가능한가의 문제에 천착한 상호미디어성(intermediality)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뉴미디어 환경과 발전을 수식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 가운데, 융합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하다. 그리고 융합도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젠킨스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개념도 일종의 융합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미디어들에 흩어져 있는 서사의 조각들이 스토리세계를 구성하고 그것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선별하는 수용자의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판적 숙고와 반성, 즉 성찰을 위한 융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젠킨스는 단기간 내에 콘텐츠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을 위해 트랜스 미디어 개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젠킨스도 언급한 바 있는 컨버전스(convergence)도역시 융합을 의미하는 다양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헤르크만(Juha Herkman)은 컨버전스 개념이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다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상호미디어 성 개념이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상호미디어성은 단순한 미디어의 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맥락에서 활용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13]. 오히려 예술 분야에서의 융합을 가리킨다. 그리고 접두어인 inter가 어떠한 미디어들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데, 그 결과 미디어들이 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미디어가 발생되는 것보다 미디어들의 특성들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14].

그렇게 일반화된 융합이 아니며 예술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상호미디어성 개념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니겠지만, 앞서 언급한 성찰의 의미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반영하여,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목적을 위한 융합을 말한다[15]. 여기에서 상호미디어성은 컨버전스와같이 경제적 맥락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특정한 미디어의 활용에 대한 반성의 의도로 다른 미디어가 투입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 특정한 미디어의 작용이 다른 미디어에 의해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수용자에게 인지된다. 그리고 그 미디어의 작용에 의한 콘텐츠에 몰입되는 효과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밴더스내치>는 앞에서 언급했던 상호미디어성의 융합 형식에 부합한다. 서사는 게임이 되며, 또 이후에 게임은 다시 서사가 되기 때문에 융합 및 변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독자가 게이머가 되어 서사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또다시 서사가 된 콘텐츠를 대하면서 게이머는 선택의 활동을 멈추고 자신의 활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과 복잡한 형식을 통해 디지털 서사의 상호작용도 결국은 조작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며, 넷플릭스 플랫폼에서의 자유도 결국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한 인식은 몰입 상태에서 발생될 수 없는 것이다.

Ⅲ. 결론

본 논문은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 콘텐츠, <밴더스내치>의 형식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피상적으로 살펴보면 그 형식은 수용자에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목적, 즉 상호작용성을 제공하려는 목적을 위해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을 따라가다 보면 곧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적이며, 오히려 수용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서사 전개가 잘되지 않는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수용자가 이 콘텐츠를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게임이 진행될수록 결과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대체로 사건의 전개는 스테판의 불행을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자유로운 게임은 결국 미리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서사로 판명된다. 주인공 스테판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처한 곤경을 극복하고 계획했던 게임을 완성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더욱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 특징이 <밴더스내치>의 형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본 논문은 이러한 복잡한 형식을 통해 <벤더스내치> 가 자기반영성을 구현하였다는 해석을 하였다. 그리고 그 자기반영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스테판은 게임을 하려는 상호작용 자의 처지를 반영하는데, 따라서 <밴더스내치>는 일종의 자기 반 영적 ‘서사’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서사를 통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메시지를 중심으로 한 자기반영만을 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자기 지시를 보여준다. 그 적극적인 자기지시란 단순히 미디어 상황이 콘텐츠에서 구현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울러 이에 대한 어떠한 비판적인 견해가 콘텐츠의 주제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밴더스내치>를 감상하면, 상호작용의 선택을 시도해보려는 시청자가 자신의 수행 그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키르히만이 언급했던 좁은 의미의 자기반영성, 즉 자기 지시 성을 말한다. 이러한 자기반영은 메시지 차원의 자기반영과 다르다. 그 다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는 작품의 인물과 수용자가 서로 대화하는 상황, 즉 메타렙시스의 불가능한 상황이 콘텐츠를 통해 구현되는 장면이다. 그러한 상황은 여러 가지 결말에서 ‘제4의 벽’이 파기되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벤더스내치>는 미디어의 문제를 주제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수용자 자신에 대한 인식을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콘텐츠에는 자기지시를 통한 성찰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지시의 성찰은 두 가지의 미디어가 서로 혼재되어 잘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게 된다. <벤더스내치>의 경우에는 서사의 미디어가 게임의 미디어로 전환되는 곳에서, 그리고 또 다시 게임의 미디어가 서사의 미디어와 융합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렇게 게임과 서사의 사이 중간적인 지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기반영성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수한 융합의 상황에서 수용자는 게임을 수행하거나 서사를 감상하지 않고, 수용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미디어와 대면하는 상황을 분명히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양식의 융합을 상호미디어성이라고 한다. 상호미디어성은 융합의 결과로 또 다른 미디어로 고착되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된 개별 미디어들의 특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를 말한다.

* 이 논문은 2020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0S1A5B8102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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