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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영화를 통해 본 미래사회와의 조우 방식 -<설국열차>와 <승리호>를 중심으로-

The Cinematic Encounters with Future Society in South Korean SF Films -Focusing on and -

  • 신진숙 (경희대학교 국제지역연구원)
  • 투고 : 2021.12.23
  • 심사 : 2022.02.14
  • 발행 : 2022.02.28

초록

본 논문은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에 대한 재앙의 상상력을 구현한 한국 SF 영화 <설국열차>와 <승리호>를 비교·분석했다. 서사 전략을 살펴보면,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미래사회를 지구환경의 위기가 일상화되고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로 재현하고 있다. 인류를 구원함과 동시에 멸망시키는 천재 과학자가 출현하고 과학기술-자본을 독점한 지배권력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평범한 주체들로 구성된 저항 세력을 내세운다. 하지만 두 영화는 이와 같은 표층서사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기저의 심층 서사에서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특히 자연, 과학기술 그리고 인간-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인식 차이를 드러낸다. 본 논문은 이를 작품속 사물(오브제)의 구성방식과 그 내러티브 기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명했다.

This article compared and analyzed the SF films Snowpiercer and Space Sweepers, which embody the imagination of disaster for the future dystopian society. In common, the two films represent the future society as a society with a serious climate crisis and an extremely widening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Both films use similar narrative strategies: representing a isolated, twisted-willed scientist figure, building a main stage as catastrophic hierarchical capitalist society, and focusing on the conflicts between a dominant group possessing the science-capital-power and a resistant but ordinary subjects. However, there is the different framing on the future society in terms of representing nature, science technology, and human-nonhuman agency. This distinction is shaped by the narrative function of the objects represented by two films.

키워드

I. 서 론

이 논문은 한국 SF 영화<설국열차>(봉준호 감독, 2013)와<승리호>(조성희 감독, 2020) 두 편을 중심으로,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를 재현한 재앙의 상상력,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서사 구조와 사물의 배치가 무엇인지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최근 행성적 기후변화와 관련된 지구위기 담론인 인류세 개념과 SF영화의 서사적 실천이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데그 연구목적과 배경이 있다.

영화 <설국열차>는 가까운 미래인 2031년, 환경단체와 개발도상국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권에 인공 냉각 물질 ‘CW­7’을 살포한 후 그 여파로 지구 전체가 새로운 빙하기를 맞게 된 미래의 가상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지구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들의 불평등한 삶을 그리고 있다. 즉,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꼬리칸 사람들과 이들과는 상반된 삶을 살아가는 앞칸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이를 유지하기 위해 앞칸 사람들이 자행하는 폭력적 통제 정치,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꼬리 칸 사람들의 반란이 중심 이야기다.

<승리호>는 지구가 사막화되어 숨조차 쉴 수 없는 세상으로 변해버린 2092년을 배경으로 한다. 우주산업체 ‘UTS’(Utopia above The Sky)가 첨단 과학기술력을 바탕으로 지구인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자행하는 폭력적 지배에 맞서 싸우는 우주 쓰레기 청소노동자 승리호의 선원들이 벌인 활약을 그린 영화다. 미래사회에서 하층계급을 형성한 청소노동자(폐기된 전투로봇 출신 ‘업동이’를 포함)들이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과학자이자 UTS 기업 대표 설리반의음모를 막아내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이 두 영화의 기본적인 시각은 한국적인 정서를 넘어 글로벌한 보편적 지구적 감성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화 속에는 한국어뿐 아니라 다국적 언어들이 등장하고 이를 번역하는 기계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두 편의 영화는 사실상 한국을 넘어 글로벌 문화 대중의 공통 감각에 호소하는 시나리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두 영화의 전제인 지구환경의 위기는 특정한 지역이나 장소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구사회 전체에 부과된 공통 위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미래에 관한 영화적 재현이 영화 수용자인 문화대중의 인식과 상호작용하는 지점이다. 즉, 지구 기후변화와 관련하여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디스토피아적 감성은 현재 문화 대중 내부에 자리한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반영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러한 영화의 미래 재현은 문화대중이 미래에 대해 품게 되는 생각과 느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즉, SF영화는 문화대중 사이에 자리한 미래에 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그리고 추론 가능한 사변적인 관점을 반영하지만, 그것은 미래사회를 가상적으로 경험하고 감각하는 특정한 감정의 프레임을 제공하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설국열차>와 <승리호> 역시 문화대중의 의식 안에서 미래에 대한 이미지를 조형하는 하나의 사고 모형으로서 검토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이 두 편의 영화가 상상하는 디스토피아적 혹은 유토피아적 미래사회의 모습은 현재 지구적 현안이 되고 있는 인류세 (the Anthropocene) 담론과 연결 지어 논의할 수 있다. 기실, 인간이 지구의 생태계를 변형해 지질학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는 인류세 개념은 최근 SF영화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개념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영화에서 제시하는 미래 인류사회의 재앙과 이에 대한 영화적 추론의 지점을 인류세의 SF영화 서사의 가능성으로 고찰해 볼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 두 편의 영화가 재현하는 이러한 지구환경 위기에 대한 공통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심층적인 차원에서 큰 시각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두 영화 모두 대중 SF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해 구현된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라는 미래세계에 대한 재현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SF영화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미래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서사적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정치적 상상에서 두 영화의 지향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시적인 디스토피아적 비전을 공유하면서도 영화적 상상력을 통한 미래와의 조우(encounter) 방식은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은 연구범위를 <설국열차>와 <승리호> 두 영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두 영화사 이의 서사적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는 것을 일차적인 연구 문제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서사 의의 미구조를 표현하는 내러티브 사물들을 추출하고 이를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기실, 미래사회를 표현하는가 상의 사물들에 대해 두 영화가 취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두 편의 SF영화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들과 함께 미래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상의 사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현존하는 사물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보이게 하는 ‘낯설게 하기’ 의 방식이 작동한다. 또 이러한 가시적 사물들뿐 아니라 돈(화폐)이나 가족 개념과 같은 비가시적 대상도 존재한다. 이러한 가시적, 비가시적 내러티브 사물들의 체계는 이 영화들이 인류세 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분석할 수 있는 유의미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분석 대상을 두 영화 모두에서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나 사물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인류세 담론에서 지구위기 요인들로 지적돼 온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인간과 자연, 사회관계, 과학기술,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를 표상하는 사물들을 선정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논문에서는 구체적인 자연물(토마토), 경제적 개념(화폐), 과학기술력(기차와 우주선), 비인간 존재(북극곰, 나노봇-인간)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SF영화의 유토피아 담론의 구성 및 재앙의 상상력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접근법을 바탕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다음 장에서는 본격적인 영화 분석에 앞서 간략하게 두 편의 영화에 대한 선행연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SF영화에서 유토피아-디스토피아적 미래 인식과 재앙의 상상력에 대한 기존 논의를 인류세 문화개념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선행연구

<설국열차>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다수의 연구논문이 축적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본 논문에서 중점을 두는서사구조에 대한 분석 논문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대립구조에 대한 조명이 많다. 즉, 앞칸과 꼬리칸으로 공간이 분리된 기차의 위계적 구조와 그러한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디스토피아적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서사적 분석 논의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앞칸/꼬리칸의 공간적 의미가 안전/불안, 청결 /불결, 평화/공포, 유희/생존과 같은 불평등 구조로 만들어진 상황에서, 이에 반기를 드는 꼬리칸 사람들의 저항 의식에 주목하는 연구가 대두분이다.

특히, 이러한 서사구조를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논문들이 있다. 이 논의들은 대부분 영화의 출발점으로 제시된 빙하기의 ‘시작’과 영화 결말에서 암시하는 빙하기의 ‘끝’이라는 거시적 자연의 순환적 시간, 그리고 이에 겹쳐진 인간의 시간이라는 구조를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관련하여, 임정식은 <설국열차>가 한국의 사회 현실보다 계급 차별이나 국가 시스템과 같은 인류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결말에서는 현실과 대비되는 신화적인 미래상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신화적인 요소에 대해 1) 순환과 반복, 2) 종말과 재생, 3) 인간과 자연(동물)의 공존으로 고찰한다. 논자는 이러한 서로 다른 시간적 질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다고 보았다. 순환과 반복은 열차의 원형 궤도 및 빙하기의 시작과 끝으로 설명된다. 세계는 예정대로 종말을 맞지만, 그 종말이 완전한 파국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또한 인간과 자연(동물)의 공존이라는 담론과 연결하여 원시 신화와의 유사성을 설명한다. 인간과 곰이 상호 존중하며 공존하는 수평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마지막 장면에 의미를 부여한다[1].

김성훈 역시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성서의 알레고리 형식으로 이 영화를 분석한다. 세계와 인류, 그리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영화 속 이미지가 종말을 파국이 아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알레고리로 설명한다[2].

서정남은 인물의 캐릭터라이제이션 자체를 알레 고리 적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커티스’와 ‘남궁민수’라고 하는 두 핵심 인물의 성격과 역할을 알레고리적 인물로 설명한다. 표면적인 극적 상황의 전개 과정에서의 ‘커티스’와 텍스트의 심층구조 속에 자리한 ‘남궁민수’의 캐릭터라이제이션을 비교․고찰한다. 특히, 논자는 남궁민수라는 인물에 주목하는데, ‘남궁민수’의 캐릭터를 현 상태와 체제로는 외부 환경의 급변에 대응하지 못하며, 따라서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로 분석한다. 남궁민수를, 비전과 대안 없이 체제 유지와 보전에만 급급한 ‘설국열차’의 본질적 비극을 냉철하게 드러내는 인물로 설명한다. 또한 열차의 문을 폭파하고 밖으로 나가고자 했던 남궁민수가 진정한 혁명가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지적한다[3].

한편, 이처럼 인간의 투쟁과 해방의 서사로 설명하는 관점과 달리 지구환경위기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비전으로 영화의 중심 서사를 해석한 생태학적 논의도 있다.

예를 들어 박현정은 <설국열차>를 SF 액션 스릴러물로 규정하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기상이변과 지구멸망 이후의 신빙하기 시대의 인간의 생존투쟁을 다룬 영화라고 설명한다. 즉, <설국열차>에서 재현한 지구멸망이 전쟁, 무기, 폭력으로 인한 인간의 문화적 재해와 화산, 홍수, 기상이변의 환경재해가 빚어낸 디스토피아라는 점에서 논자는 도시풍경, 기술문명의 종말, 현대인의 추락, 재앙, 죽음, 파괴라는 인류몰락의 서사에 주목한다[4].

<설국열차>와 비교해 <승리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승리호>에 관한 최근의 대표적인 논의는 박세준과 진은경의 논의다. 이들은 사회학 관점에서, UTS 의회장이자 독재자인 ‘설리반’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사회가 주술화된 전근대로 사회로 회귀한 것에 주목한다. 가상의 미래 현실을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구조와 연결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으로 평가한다. 국가의 기능이 붕괴한 미래사회가 현재의 현실을 재현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또한 생태학적 관점에서 에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도 함께 제시한다. ‘꽃님이’(도로시)라는 등장인물이 환경오염으로 파괴된 지구를 구하는 여신의 이미지로 재현된 것에 주목한다. 여성의 모성 본능 가운데에서도 보살핌과 생명, 치유를 상징하는 꽃님이의 이미지가 장애, 나이, 인종, 성별, 언어도 달라도 생존과 공존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차별 없이 어울려 사는 세계를 지향하는 생태적 유토피아 의식과 맞물려 있다고 분석한다[5].

한편, 신성환은 <월-E>와 <승리호>, 두 편의 영화를 비교하면서 지구적 차원의 생태적 파국과 쓰레기 재난에 대한 상상력에 초점을 맞춰 서사구조를 분석한다. 근대 이후의 문명이 사실상 ‘쓰레기 문명’으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두 영화가 어떤 생태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고찰한다. 그리고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쓰레기 청소부’ 주인공을 등장시켜, 쓰레기 과잉으로 황폐화된지구와 우주를 극복할 대안적 가치를 식물의 상상력과 공존의 윤리로 제시한 점을 주목한다. 논자는 이 영화를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을 구분하고 위계화하는 기준을 비판하고, 쓰레기 되기를 강요하는 폭력에 저항하고 생명을 지향하는 서사로 설명한다. 특히, 무용한 쓰레기로 치부되는 사물 및 타자와 어떤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과 인공환경의 균형을 추구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을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에 의미를 부여한다[6].

이러한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설국열차>와 <승리호>에 대한 연구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문제의식은 환경재앙을 가져온 인간문명과 근대과학기술사회에 대한 영화적 해석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인류세의 영화의 가능성, 즉 지구적 환경 위기 담론 속에서 미래에 대한 윤리와 정치를 상상하는 영화 서사의 가능성으로 포괄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다음 장에서는, SF 담론에서 전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 담론과 관련하여 SF 서사에서의 재앙의 상상력 및 이와 연결할 수 있는 인류세 문화개념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Ⅲ. 이론적 배경

1. 인류세 담론과 영화

인류세 담론은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J. Crutzen) 과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가 2000년 새로운 지질학적 연대로 인류세 개념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인류세 개념은 지질학 분야를 넘어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인류세라는 용어는 지질 학적개념을 넘어 문화적 개념으로 논의되고 있다. 인류세 논쟁이 인간의 시대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연-문화 관계를 재사유하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다[7]. 인류세 개념의 일반화는 과학, 기술 그리고 환경에 관한 역사에서 이제까지 기록해온 지구적 내러티브들을 다시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인류세 논쟁의 핵심에 대해 심효원은, “산업혁명 이래 화석연료 사용 및 대규모 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인류세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한 바 있다[8]. 즉, 그에 따르면, 인류세 담론이, “화석자원(석탄, 석유) 채굴 및 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빙하 감소, 동식물 멸종, 이상 기후, 농작물 수확량 등 지구 환경에 전면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지질학적 자원의 무분별한 채굴과 긴 시간 지속되는 플라스틱의 축적 등의 문제 요인이 갈수록 더해지는 상황”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아울러 심효원은 인류세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즉, “인류세 담론은 지구의 변화에 대한 기본적인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 전체의 새로운 윤리학을 구축해야 하는 21세기의 인문학적 도전”이라고 설명한다[8].

이와 같은 맥락에서, 트리슬러(H. Trischler)는, 인류세가 인간과 지구에 대한 의미 있는 물음을 만들어낸다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미래의 사업, 노동, 삶은 무엇인가?” “기술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지식의 소통과 생산은 어떤 형식이 적합한가?” “우리 인간은 전체 지구 시스템에 영향을 주는 행위자로서, 인간의 행성적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내러티브가 필요한가?” 등, 인류세 담론이 인간의 미래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담론적 의미를 평가한다[7].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류세라는 개념은 지질 연대적 개념을 넘어 문화개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인류세 개념은 지질학적 용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변화와 그 역사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 역사와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한 프레임으로 창안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트리 슬러는 인류세가 지질 연대로서의 개념을 넘어 문화적 개념으로 사용되면서부터 기존의 인간중심적 스토리들과 내러티브들을 의문시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인류세 개념이 기존의 인식론적 경계들을 흐릿하게 만들면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학제적(cross-disciplinary) 협력을 자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7]. 이와 관련하여 심효원은 인류세 담론을 통해 기존의 근대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관계, 즉 지구 생명체를 비롯한 유기·무기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8].

SF영화라는 장르 역시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문화적으로 인류세의 관점에서 미래사회를 인식하는 사고의 모형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영향력을 끼쳐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트리슬러에 따르면, 학문 분야 전반으로 인류세 개념이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를 통해 인류세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강화되어간 까닭도 존재한다[7].

따라서 지구온난화와 사막화로 인한 인류 멸망 혹은 멸종이라는 재앙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설국열차>, <승리호> 두 편의 SF영화도 이러한 관점에서 검토가 가능하다. 미래를 기후변화로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붕괴의 과정을 맞이하는 상황으로 재현한 이 두 작품은 인류세 시대의 영화적 대응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즉, 이 두 영화를 인류세의 문화적 개념과 연결된 서사적 실천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이 두 영화에서 재현한 미래, 말하자면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환경변화와 지구사회 전체를 멸망하게 만드는 파국의 서사가 인간중심주의적 시선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진정한 인간의 윤리와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2. 재앙의 상상력

이러한 인류세 영화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재앙의 상상력’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수전 손탁의 관점이 유의미한 시각을 제공해준다. 손탁은 SF 영화가 시각적인 감각적 정교함을 토대로 인류의 죽음, 더 나아가서 도시의 죽음과 인간 자체의 파멸을 환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장르라고 말한다[9]. 즉, SF영화가 과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말하자면 과학적 추론을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엔 인류에게 닥친 재난과 파국을 상상하는 영화적 재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SF영화에서의 재난 상황은 실재의 재난이라기보다는 상상된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손탁에따르면, SF 영화의 재앙의 상상력은 재앙 자체를 스펙터클화함으로써 일종의 파괴의 미학을 구축한다. 도시와 사회를 파괴하고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재난의 스펙터클을 구현할 때 그것은 관객에게 일종의 미학적 즐거움 또는 오락을 제공한다. 실제로 성공한 훌륭한 SF영화들은 대부분 이러한 가상의 파괴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손탁은 세계의 종말을 그린 SF영화들이 내놓는 가장 흥미진진한 스펙터클은 파괴된 도시의 장면이거나 멸망한 도시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을 상상할 때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손탁은 재앙의 상상력이 재앙을 공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문화 대중으로 하여금 일상 삶에서 부여받는 일반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SF영화는 단지 환상적인 혹은 공상적인 영화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파괴와 파국을 불러오는 재앙의 상상력은 그 이면에 자리한 현대사회의 불안 의식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SF영화에서 재현하는 비현실적인 상황들은 현실과 분리된 영상이지만, 그 안에는 현대인의 실존을 둘러싼 깊은 불안감이 내재해있는 것이다. 손탁이 SF영화를 비인간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생겨나는 부정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적 신화이자 알레고리라고 보는 이유이다[9]. 손탁에의하면, SF의 재앙의 상상력과 그 이미지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때는 현대의 도시 사회가 지닌 비인간적인 조건을 둘러싼 역사적 불안감이 강화될 때이다[9]. 바로 이 점에서 대중의 호응을 받았던 SF영화 <설국열차>와 <승리호> 역시 문화대중의 불안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SF영화의 재앙의 상상력은 현재 사회에 대한 현실인식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SF 서사에 대해 그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 혹은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하는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SF영화의 본질에 비추어 보면 사실상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재앙으로 파국을 맞는 영화적 상황이 현대인이 안고 있는 사회적 공포, 불안의 감정들을 배후로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9]. 따라서 SF 영화에 재현된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실제로는 현재의 삶의 모순이 투영된 결과이자 그 형태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SF영화의 디스토피아-유토피아에 대한 상상과 재앙의 상상력은 현대인이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반추해볼 수 있도록 만드는 허구적 리얼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SF영화의 재앙의 상상력이 지닌 의미와 기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그 자체로 가상의 파괴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차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상상력은 사실상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의식·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역사적 불안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영이 세계 자체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SF영화에서 재현하는 파괴의 미학은 문화대중에 내재한 문명에 대한 불안 의식을 표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SF영화의 재앙의 상상력은 또 다른 리얼리즘으로 고찰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3. SF서사와 사물(오브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SF에 나타난 재앙의 상상력은 그 자체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비판적 상상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SF가 현실과 단절하면서도 현실 자체를 비판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SF라는 장르는 경계가 흐릿하고 다차원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담론적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10].

환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SF의 문화적 의미는 수빈(Darko Suvin)이 SF가 실증적 세계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전제로 하면서도 판타지나 비현실적인 소망 충족을 위한 서사들과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연결된다[10]. 이러한 수빈의 개념을 토대로 하는 SF에 관한 논의는 SF가 단순히 불가능한 현실을 그리는 현실 도피적인 장르라는 기존의 생각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오히려 SF가 전복적인 사회계급의 부상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도록 만든다. 이는 SF 가동시대의 사회와 비판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된 담론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러 한수빈의 생각은 이후 일정한 비판을 받게 되지만, 여전히 SF라는 장르의 기본적인 개념으로서 적합한 내용으로 평가받고 있다[10].

유토피아-디스토피아에 관한 서사들 또한 수빈이 말한 이러한 SF 특유의 현실인식과 관련하여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소설은 우월한 사회를 예로 들어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를 비판하고, 디스토피아 소설은 현존하는 질서의 가장 나쁜 특징을 과장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는 서사 구조를 구성하곤 한다[10]. 즉, SF는 현실과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이미 알려진 세계와 대비되는 상상 속의 ‘다른 곳’들과 ‘다른 시간대’를 구성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10]. SF의 디스토피아- 유토피아적 환상은 인류사회가 도달한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 사이의 긴장감을 재현하고 현재 과학기술이 제시하는 미래의 약속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에 자리한 테크노필리아적 경향에 대한 거리 두기를 가능하도록 만든다[10].

그런데 SF 서사의 이러한 문화사회학적 기능 이외에도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인지적 소격 효과를 만들어내는 서사 전략을 활용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SF 서사들은 대부분 기존의 사물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전략을 취하곤 한다. 즉, 인지적 소격 효과를 통해 익숙한 사물이나 대상을 낯설게 보여지도록 만드는 재현 방식을 사용한다. 이렇게 새롭게 구성된 사물들의 체계는 문화대중이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10]. 말하자면 SF 서사는 사물에 대한 인지와 함께 사물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창조적 영역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기법이다[10].

재앙의 상상력을 논하면서 손탁 역시 SF 영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서사 구조뿐 아니라 물체(things), 물건(objects), 기계(machinery)의 배치에서의 새로움을 지적한 바 있다. SF영화는 새로운 사물의 배치를 통해 사물들을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사물에 새로운 내러티브 기능을 부여한다. 바로 이 점에서 SF 영화에서 인간 이외의 비인간 오브제로 활용되는 사물들은 단순히 사건의 배경에 대한 장식적 수사가 아니라내러티브 자체를 이끄는 주요 역할을 맡는 행위자 (agency)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SF영화가 추구하는 윤리적 가치란 보이는 영상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인물의 생각이나 느낌, 의지 그리고 서사의 지향성 등을 영화의 오브제들을 통해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SF영화에서 파국적 현실의 혼돈을 상상적으로 경험하는 문화대중은 인물들보다 사물들의 가치와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재앙의 본질을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사물이 사건을 이끄는 힘의 원천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손탁은 SF영화에서 사람은 인공물이 없으면 벌거벗은 존재나 다름없다고까지 말한다[9].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공물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가치를 표상하는 내러티브 기능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사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브제(objet)는 느끼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주체’에 대응하는 ‘객체’, 또는 ‘대상(對象)’으로서의 물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주관적인 것과 반대되는 객관적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11]. 따라서 SF영화 속에서 오브제에 대해서 기존의 일상적인 사물들을 본래의 용도에서 떼어내어 어떻게 재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나 느낌을 생성하도록 만드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은주에 따르면, 이러한 오브제들에 의해 구축된 영상 이미지와 이를 구현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대사가 아닌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오브제로 이루어진 전체의 이미지 체계가 대사 이상의 함축적 소통을 수행하기 때문이다[12]. 즉, 영화 속 사물의 체계는 영화 서사의 구조와 분리할 수 없다. 유수연에 따르면, 사물들은 시각적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전달하는 것은 물론 물리적 의미, 감정전달의 심리적 의미, 문화사회적 의미 등 표면적, 심층적, 복합적으로 의미를 생성 작용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13]. 영화에서 구현된 사물 배치 전략이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영화 내러티브를 보다 구조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설국열차>와 <승리호>의 서사구조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Ⅳ. <설국열차>와 <승리호>를 통해 본 SF영화의 디스토피아적 미래 서사와 재앙의 상상력

본 장에서는 <설국열차>와 <승리호>의 텍스트 구조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두 작품은 재앙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미래사회를 사변적으로 추론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층 서사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의 심층에 자리한 서사적 의미구조는 차이를 드러낸다. 따라서 표층과 심층에 자리한 의미구조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이 두 편의 SF영화가 활용하는 재앙의 상상력이 어떤 디스토피아-유토피아 서사구조와 연결되어 있는지, 그 차이점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에 이번 장에서는 표층서사의 공통점으로 ‘재앙의 상상력’이 구성되는 방식을 먼저 살펴보고, 이러한 공통의 상상력 안에 자리한 서로 다르게 재현된 미래사회와의 조우 방식을 영화 속 오브제들의 구성과 배치를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재앙의 상상력

1.1 환경재앙 시나리오의 재현

<설국열차>, <승리호>는 ‘지구’라는 거대 행성을 토대로 재앙이 닥친 미래 현실을 상상하여 재현한 작품들이다. <설국열차>는 지구 전체, <승리호>는 우주적 시점에서 미래사회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지구가 회복할 수 없는 환경재앙을 겪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처럼 미래사회를 환경재앙의 시대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현실의 문제들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기후변화가 초래한 디스토피아적 현실 인식 속에서 인류멸망의 서사를 기본 틀로 구성한다.

우선, <설국열차>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위기에 처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 냉각 물질을 대기권에 살포하면서 지구 전체가 새로운 빙하기에 맞게 된다는 설정이다. 빙하기가 시작된 지 17년이 흐른 2031년,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끝없이 달리는 기차에서 살아간다. 기차에 탄 극소수의 사람들만을 제외하고 인류 전체가 멸망한 상황이다.

<승리호> 역시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지구적 환경재앙을 배경으로 한다. 미래의 지구는 사막화되어 숨도 쉬기 어렵다. 2092년, 지구의 대기는 오염되고, 토양 이산 성화 되어 생명도 자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두 영화 모두 지구멸망이라는 재앙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추론해 보여주고 있다. SF 영화 서사의 하위 장르라고 할 수 있는 파국적인 아포칼립스 서사의 특징이 이 두 영화 모두에서 발견된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이러한 지구멸망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멸망 이후, 혹은 멸망에 가까운 지구의 모습을 재현해주는 데 그친다. 사실상 ‘미래를 재앙으로 보여주기’ 그 자체가 이 영화들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두 편의 SF영화가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에 대한 대중의 상상을 공유하고 그러한 전제에서 출발해 새로운 미래 서사를 기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 과학기술의 이중성: 구원 혹은 멸망

<설국열차>의 맨 앞칸의 지배자 윌포드는 ‘윌포드 인더스트리’의 창시자이자 설국열차를 만든 과학기술자이다. 그는 지구멸망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영원히 멈추지 않는 완벽한 엔진을 창조해낸다. 이 영화의 원작 만화에 따르면, 이 기차는 무려 1001칸이나 되는 거대한 길이를 가졌다. 기차가 지구 전체를 한 번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년이다. 설국열차는 1년을 주기로 지구 위를 17년째 움직이고 있다.

여기서 기차의 의미는 복잡하다. 우선, 그것은 인간이 만든 ‘도구’로서의 기계이다. 동시에 그것은 빙하기에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집’이다. 나아가 그것은 인류 멸망 이후에 만들어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로그려지고 있다. 또한 기차는 인간과 자연 모두가 닫혀있는 공간에 만들어진 하나의 폐쇄된 ‘생태계’로 존재한다. 윌포드는 무한히 존재하는 얼음과 눈을 녹여 물을 제공하는 기술까지 만들어 기차를 완벽한 하나의 생태계로 움직이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 모두에게 이곳이 ‘집’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앞칸 사람들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의 삶의 양식을 여전히 고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반면, 꼬리칸의 사람들은 거의 야만상태로 회귀한다. 이른바 꼬리칸의 빈자(貧者)에게 기차는 그 자체로 목숨마저 위협받는 지옥과 같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 설국열차가 설계될 때부터 부자(富者)만이 탑승권을 가졌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자 윌포드의 존재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는 우선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한 과학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인류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파괴자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전형화된 과학기술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은 <승리호>에서도 발견된다. 이 영화에도 광기어린 천재 과학자 ‘설리반’이 등장한다. 그의 나이는 152세로서, 그는 이미 생명 연장의 기술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사막화된 지구에서 벗어나 우주에 완전히 평화로운 녹색의 생태계를 건설하려는 유토피아적 열망을 실현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과학의 힘으로 생태학적 이상사회라고 할 수 있는 에코토피아(ecotopia)를 구현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인류 정화를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녹색의 화성 프로젝트는 사실상 ‘오염된’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악마적 기획이며, 이 점에서 과학은 그 양면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두 영화 모두에서 과학기술사회의 미래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과학은 인류를 구원함과 동시에 인류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거나 인류의 생명 전체를 앗아갈 수 있는 파괴력을 갖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이중적인 생각은 SF영화의 재앙의 서사에서 보면 낯선 설정이 아니다. 손탁에 따르면, SF영화는, 과학이 사회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활동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심이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과학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자의 올바르지 못한 비틀린 의지가 문제라는 설정을 더 선호한다. 즉, 과학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과학자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SF영화에서는 일반적으로 과학기술과 고립된 지식인이라는 대립 구도가 주로 만들어진다[9].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두 영화도 이러한 전형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활용하고 있다.

1.3 자본주의 사회: 양극화의 심화

<설국열차>, <승리호>에서 그리는 미래사회의 가장 심각한 비극은, 앞서 살펴본 기후재앙만이 아니다. 기후재앙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더 심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즉 빈자와 부자의 양극화 현상이 극의 중심 서사로 자리한다. 특히 국가보다 커진 지구적 규모의 기업과 그 대표자로 설정된 자본가의 모습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를 설계한 과학자이자 윌포드 인더스 트리의 총수격인 ‘윌포드’라는 인물이 우상화되는 장면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실상 인류 멸망으로 국가가 사라진 자리에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윌포드 인더스트리라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승리호>에서는, <설국열차>에서보다 더 신격화된 자본가이자 과학자, UTS 기업 총수인 ‘설리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지구 사막화를 해결할 수 있는 녹색의 과학기술을 발견했다고 선전하면서 자신이 만든 UTS 에코토피아에 살 수 있는 시민권을 판매한다. 하지만 시민권 자체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을 향해가는 지구에서 혹은 우주에서 보호받지 못한 헐벗은 생명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처럼 두 영화 모두에서 미래는 과학기술과 자본을 지닌 지배계급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일상화되는 사회로 그려진다.

1.4 유토피아적 환상과 충동

<설국열차>, <승리호>에서는 기업이 국가의 역할을 대체함으로써 생겨난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의 가혹한 논리에 저항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주요 서사로 구성된다.

<설국열차>에서, 꼬리칸의 반란을 주도했던 ‘커티스’ 와 함께 그의 일에 동참해 객실칸마다 닫혀 있는 문을 열어주는, 애초에 이 문의 설계자였던 ‘남궁민수’라는 인물이 있다. 영화 속에서 꼬리칸의 반란은 디스토피아로 변한 미래사회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자율적인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사건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그 자체로 다른 현실에 대한 상상,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대중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 바깥의 세계에 대한 추구는 오랫동안 SF서사들을 취해온 기본적인 주제인 유토피아적 충동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승리호>에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충동이 <설국열차>에 비해서는 약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설리반의 인류멸망기획을 저지하고 ‘꽃님이 ’를비롯한 인류 전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는 희생적 행동을 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영웅적 선택과 실행은 비인간화된 과학기술사회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해결하는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의 존재 또한 주목을 요한다. 두 영화 모두 아이라는 존재가 서사의 귀결점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또 다른 공통점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적 충동과 환상은 가장 순수할 것으로 예상되는 아이라는 존재와 결합해 구현된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에서 태어나 17살이 된 남궁민수의 딸 ‘요나’가 나온다. 영화의 마지막에 기차가 폭발해 드디어 기차가 멈추었을 때 생존한 두 사람이 바로 이 요나와 엔진 칸에 잡혀갔던 ‘티미’라는 소년이다. 비록 혁명의 주동자들은 죽었지만, 어른들이 꿈꿨던 혁명의 꿈을 이 두 아이가 이어갈 것이라는 암시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승리호>에는 설리반이라는 과학자의 뒤틀린 의지와 반대되는 순수한 아이 ‘꽃님이’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나노봇과 융합된 신체를 지니고 있어서 미래의 환경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진다.

2. 미래사회와의 조우와 인식 방법

<설국열차>와 <승리호>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래사회를 디스토피아 혹은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로 인식하고 재앙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위기를 재현하는 서사적 특징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미래사회와 조우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시각을 드러낸다. 이는 재앙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오브제들의 배치와 그 내러티브 기능을 통해 고찰해 볼 수 있다.

2.1 자연과의 관계: 단절과 융합

영화의 배후 서사로 환경재앙 시나리오에서 출발하는 두 작품 모두 미래사회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지금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사변적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미래에는 지구적 환경재앙으로 기존의 의미체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특히 인간이 붕괴시킨 지구생태계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상상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한 상상은 인류세 담론과 연계된 미래 SF 서사에서 핵심적인 영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설국열차>와 <승리호>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토마토’라는 자연 오브제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자.

우선, <설국열차>에는 앞칸 사람들이 식량으로 사용하는 과일과 채소들을 재배하는 장소를 표현한 장면이 있다. 꼬리칸의 공간과 사람들 모두에게서 자연의 색채가 사라져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앞칸의 모습은 식물이 자라고 있어 풍부한 자연의 색채가 채색된 화면이 배치된다. 하지만 앞칸에서 자라는 특별한 식물들이란 오렌지, 토마토와 같이 지금 현실에서는 평범한 식물들이다. 이러한 평범한 식물들은 영화 속에서는 빙하기로 인해 지구상에 멸종해버린 식물들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져 새롭게 의미부여 된다.

그런데 식물의 멸종이란 사실상 이러한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지구의 토양 자체가 멸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식물이 자라고 있는 이 기차칸 영상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물은 바로 ‘흙’이다. 이 흙은 이미 17 년 전에 지구상에서는 멸종해버린 흙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흙의 상태다. 기차 안의 흙은 역설적으로 재앙 이전의 흙 상태보다 더 생명력이 풍부한, 유기적인 토양의 특성들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흙 속에는 당시 환경오염으로 지구상의 많은 토양에서 이미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렁이도 살아 있다.

이러한 진짜 자연을 모방한 토양에서 자란 토마토는 (본래적인) 자연의 토마토와 어떻게 다른가. 영화 속 토마토라는 자연물은 사실상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폐쇄된 생태계 안에서‘만’ 자랄 수 있다는 점에서, 멸종해버린 열린 자연의 네트워크 안에 자리했던 토마토와는 그 성격이 같을 수 없다. 영화 속 토마토는 멸종된 자연의 사후(死後)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인간의 보살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 자연일 뿐 아니라 이미 멸망한 사물의 복제이다. 말하자면 자연의 이미지-기호일 뿐 자연 그 자체의 물질성으로 경험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설국열차 안의 자연의 모습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현재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 상태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이 멸종의 오브제들은 지구멸망 이후 온실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생태계를 표상한다. 영화 속 자연물들이 비록 외양은 자연이지만 기이한 낯선 느낌이 발현하는 사물로 다가오는 이유다. 즉, 영화 속 재앙 이후의 자연의 오브제들은 흙과 토마토의 멸종과 생존의 서사를 구축하며, 이는 일상적으로 구성해온 자연이라는 기존의 ‘개념’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내러티브기능을 수행한다.

한편, <승리호>에도 ‘토마토’가 출현하는데, 원래 이것은 이미 죽어서 물을 줘도 갈색으로 변해버린 가지와 잎을 지니고 있었다. 소생 불가능한 식물 존재였다. 그런데 영화에는 등장인물(박씨)이 이미 죽어버린 이 토마토에 물을 계속해서 주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꽃님이가 이 죽은 토마토를 바라보자 토마토는 곧바로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는 토마토를 바라보는 꽃님 이의 신체와 결합되어 있던 나노봇들이 주변 공간의 물질 전체와 교신 또는 교감하면서 죽은 식물을 살려내는 장면이다. 이 점에서 꽃님이라는 존재는 자연이 멸종한 미래사회의 재건을 가능하게 할 유토피아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즉, 영화는 인간과 과학기술이 결합한 제3의 인간으로서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이미지를 꽃님이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시선은 자연물에도 대입할 수 있다. 즉, 영화 속 토마토는 자연적인 것의 사멸 이후에 나노봇들에 의해 재생된,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의미와 성격이 변화한 포스트-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승리호>의 이러한 장면 설정은 분명 <설국열차>와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설국열차>와달리 토마토라는 사물 자체가 낯설게 보이도록 배치되지는 않는다. <승리호>에서는 토마토가 새로운 상품으로 재맥락화된다. 즉, 주인공들이 우주청소부들이 모여 사는 비시민 거주지 주민들에게 토마토를 파는 장면이 있다. 말하자면 되살려낸 토마토의 기이함은 상품의 희귀성으로 변환된다. 때문에 <승리호>의 토마토는 기존의 토마토와 인간이 맺어온 경제적이고 상식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 속 토마토는 <설국열차>에서처럼 멸종한 자연생태계의 복제가 지닌 기이한 낯선 느낌을 발현하지 않는다. <승리호>의 토마토는 오히려 ‘놀랍고’ ‘즐거운’ 감각적 경험으로 그려진다. 미래사회에서 인간과 자연이 과학기술을 매개로 교감신경을 공유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강조될 뿐이다, 따라서 실제 인간과 자연이 맺어온 인간중심주의 적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 <승리호>에도 생태계 자체를 재창조하는 과정이 등장한다. 설리반은 인간이라는 존재보다도 자신이 만든 ‘흙’을 더 깨끗한 물질로 인식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생태계의 재생은, 꽃님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꽃님이는 식물을 재생시킬 수 있는 마법적이면서 동시에 과학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서, 이 영화 속 이상적인 생태계인 ‘에코토피아’를 만든 생명의 원천이다. 나노봇이라는 미시 존재와의 결합과 융합이라는 과학적 상상이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설국열차>에서는 이러한 자연의 복제가 기이하게 그려지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과학기술에 의해 복원된 생태계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적 환영으로서 신비롭게 다가온다.

물론 <승리호>에서도 이러한 과학기술을 잘못된 목적으로 사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생명이 메말라버린 사막화된 미래사회에서 생명과 과학의 융합을 통해 만들어내는 녹색화 과정은 환경재앙이 현실로 닥친 현재의 인류에게 가능한 미래라는 점에서 긍정되지만 이를 사유화하고 폭력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설리반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승리호> 가 이러한 맥락의 생태주의적 성찰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현재 문화대중의 소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설국열차>는 자연 자체를 낯설게 보이게 만듦으로써 자연을 다루는 기존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또 다른 생존 동물 ‘북극곰’의 모습은 기차 온실에서 인공태양과 토양에서 재배되고 있던 토마토라는 ‘복제된’ 자연과 대립하는 ‘진짜’ 자연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닫힌 생태계 안에서 자라난 복제된 토마토는 대상화된 자연으로서 그 의미가 도구적·심미적 의미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하지만 북극곰은 인간중심주의 적 시선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도구적 자연관에서 벗어난다. 즉,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에서 이러한 북극곰이 인류 마지막 생존자인 요나와 티미와 마주하는 장면은 인간과 자연을 대칭적 관계로 다시 바라보도록 만드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요나와 티미로재현된 인간의 서사만이 아니라 재앙현실 속에서의 북극곰의 서사, 즉 비인간 존재로서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다른 서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이러한 두 개의 서사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다시 연결한다. 즉, 인간과 자연(곰) 사이에는 혹독한 빙하기를 견뎌낸 자들이 갖는 ‘우정’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멸망 이후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함께 공존했던 문명 이전상태로 되돌아가는 시간적 회귀에 대한 상상이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마주보는 수평적인 대칭적인 관계로 다시 돌아가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2 과학기술과의 관계: 멸종과 혼종

<설국열차>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재앙의 소재는 지구 생명체의 ‘멸종’의 시나리오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으로 가정된 가상의 물품들은 인류멸망이라는 재앙의 상상력 속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해석된다. 그것은 가시적인 기존의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사물들이 낯설게 보이게 만든다. 사실 이러한 재현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SF 서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설국열차>에는 멸종된 사물의 목록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작중인물 커티스가 꼬리칸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이미 총알이 멸종하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멸종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의 모든 사물이 멸종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설국열차도 영원히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기차라고 선전되지만 사실상 그것을 작동하는 부품들 역시 멸종의 과정을 피해갈 수 없다. 더 이상 제작할 수 없는 부품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에 따라 멸종된 부품을 대신할 대상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윌포드는 어린아이들을 이용해 멸종된 부품의 기능을 대신하도록 만든다. 인간이지만 인간성 자체를 지워버림으로써 사물이 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에서 디스토피아 현실을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엔진 칸의 윌포드 또한 자유롭지 않다. 물론 부품으로 교체된 아이 존재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윌포드 역시기차라는 기계-세계에 종속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사물화된 인간으로 표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사물화된 세계의 서사와 맞서는 해방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오브제들의 구성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수 있다. 파국으로 치닫는 기차의 운명에서 마지막 인류를 구원하는 열쇠는 ‘성냥’이다. 멸종한 담배와 성냥을 지니고 있던 인물은 남궁민수이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이 성냥은 처음엔 꼬리칸의 반란 과정에서 꼬리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장치(횃불)로 활용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이 성냥이 기차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기폭제로 활용된다. 사실 부품의 멸종이 말해주는 것은 기차 엔진 자체의 멸종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차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수명을 다하는 존재가 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멸망의 시간을 기차 역시 막을 수 없다. 이러한 멸종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이 성냥이고, 이것이 전체 서사에서 성냥이라는 오브제가 지닌 중요한 내러티브 기능이다. 이러한 오브제의 설정은 서사적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미래의 과학기술(CW­7)이 지구의 생명 전체를 멸종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작은 보잘것없는 성냥은, 어떻게 보면 고대 유물과 같이 현실에서도 이미 그 쓰임새가 다해 폐기된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최후의 멸종으로부터 구원하는 열쇠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기존 사물에 새로운 내러티브 기능을 부여하는 이러한 방식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크로놀’이라는 산업폐기물에서도 발견된다. 크로놀은 처음에는 환각제로 사용된다. 하지만 크로놀의 진정한 힘은 이것들을 뭉쳐 불을 붙일 경우 폭탄이 된다는 데 있다. 이를 알고 있었던 남궁민수는 성냥(불)을 이용해 크로놀 폭탄을 터뜨려 달리는 열차를 멈추고 엔진을 파괴해 열차의 문을 연다.

이런 방식으로 <설국열차>에서는 다양한 ‘멸종된’ 사물 오브제들이 등장하고 새롭게 내러티브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멸종의 서사는 사물들을 기존의 일상적인 맥락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의미를 변형하거나 증폭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부여한다. 영화는 첨단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오브제들과 대립하는 구식의 오브제들을 오히려 서사적 해방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행위소로 배치한다.

이와 달리 <승리호>에서는 그 어느 것도 멸종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히려 사물들은 브리꼴라주와같이 조합한다. 이질적인 사물들이 서로에게 덧붙여짐으로써 새로운 사물이 만들어진다. 쓰레기로 처분된 사물들은 그 부품을 바꾸거나 다른 부품들과 이어 붙여짐으로써 새로운 존재(예를 들어 ‘업동이’와 같은 존재)를만들어낸다. 이러한 사물들의 융합 과정은 사물의 멸종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승리호라는 우주선 역시 마찬가지다. 승리호는 우리가 SF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첨단의 우주설비를 갖춘 우주선의 모습과 다르다. 이질적인 다양한 도구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그야말로 정돈이 안 된 것 같은, 어수선한 사물-기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의 혼잡성은, 인류를 정화하려 했던설리반의 공간과 매우 대조적이다. 설리반의 우주선은 첨단의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무채색의 깨끗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어수선한 선이나 복잡한 장식들이 모두 제거된 넓고 세련된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UTS의 공간적 풍경은 특히 우주의 비시민 거주지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물의 브리꼴라주가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사실상 개념들의 브리꼴라주 효과도 가져온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가족의 ‘개념’ 자체가 변화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근대적 가족의 개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 위에 이질적인 다른 풍경이나 사물들이 삽입되면서 더 복잡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아버지-어머니-자식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가족 로망스를 유지하면서도 그 자체를 교묘하게 비틀어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기존의 젠더 구분에 의한 공적, 사적 영역이 무너지는 점, 그리고 혈연 중심의 연결고리는 존재하지 않는 점 등 기존 가족 체제의 해체요소가 발견된다. 하지만 보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가족이 이제 더 이상 인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과 비인간 로봇 또는 나노봇-인간이 하나의 가족 구성원으로 재구성된다. 이는 SF영화 서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연대의 모습을 전통적인 가족적 풍경으로 재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승리호 선원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그 거실 모습을 보면, 소파와 쿠션 등이 배치되어 일반적인 가정집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이는 첨단 미래사회라는 시간 설정에서 본다면, 매우 낯선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는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의 오브제들을 브리꼴라주함으로써 현재 우리 내부에서 상실되어가고 있는 따뜻한 가족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미래적 시점에서 재-맥락화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마지막은 승리호의 선원들과 꽃님이가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미래적이지만 여전히 근대적인 가족의 모습을 갖춘 형태의 풍경이 그려진다. 미래사회의 모습 안에 근대사회의 다양한 삶의 패턴들과 모습들이 덧붙여지면서 가족의 개념이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특히, <승리호>에서는 핵심 미래기술은 인간의 신체가 융합해 새로운 행위자가 구성되는 것이다. 미래기술로 상징되는 나노봇과 인간 신체가 결합함으로써 마술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즉, 한편으로는,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불안의식이 내포되어 있지만― 설리반과같은 그릇된 의지를 가진 과학자에 의해 악용된 과학기술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견해―,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과학기술이 선하게 사용될 때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영화에서는 미래의 첨단 과학은 죽어가는 식물도 살려낼 수 있는 긍정적 힘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도 이러한 과학기술력에 의해 진화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공조와 융합을 강조하는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승리호>에 등장하는 이러한 융합의 풍경은 <설국열차>에서 추론적으로 보여주는 멸종의 풍경과 재현적 전략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비록 두 영화 모두 인류 멸망의 상상력을 동원하지만,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해석에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2.3 자본주의의 미래: 화폐의 멸종과 진화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정치적 시선 또한 두 영화는 큰 차이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두 영화가 선택한 결말은 동일하지 않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국열차>에서는 기차라는 폐쇄된 생태계를 바탕으로 사물들이 멸종해간다는 상상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멸종의 리스트에는 단순히 사물만 등재된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과 제도들 또한 멸종된다. 대표적으로, 화폐(돈) 라는 추상적 단위가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화폐가 멸종한 미래사회에는 어떤 식으로 사물들을 교환하게 될까라는 물음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꼬리칸에서는 물물교환의 형태로 변형된 작은 사회가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꼬리칸의 모습은 생존 이외에는 다른 삶의 목적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이다. 과거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물품이 멸종함으로써 물건의 가치와 희소성 또한 달라진다. 따라서 가치체계 역시 멸종 전과는 판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화폐의 멸종의 핵심은 소망하는 물건이나 행위를 돈을 주고 구매하고 소비해온 자본주의적 개념 자체의 멸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물자가 멸종해가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사물 자체의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를 앞서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멸망 이후의 사회에서 물품의 가치는 사물 자체의 사용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이 멸종해버린 상황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역설적으로 꼬리 칸에서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희귀하지는 않은 사물인 ‘단백질바’(식량)가 멸종한 화폐를 대신하게 되는 상황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커티스가 단백질바에 숨겨져 전달되는 메시지-캡슐을 얻기 위해 그것을 가진 아이(티미)에게 다른 사물과 교환하자고 하자, 아이는 ‘축구공’ 을 요구한다. 축구공은 대략 단백질바 다섯 개보다도 가치 있는 물건으로 거래된다. 단백질바는 주지한 바와 같이 꼬리칸 사람들의 유일한 식량이다. 그런데도 축구공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가 미래사회의 멸종의 리스트에 ‘유희’라는 개념을 포함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승리호>에서는 이러한 화폐의 대용품은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특이한 점이라면 첨단 금융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과학기술사회에서 오히려 실물 지폐가 사용된다는 점 정도가 눈에 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미래사회는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가 더 심화된 사회로 그려진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자본의 권력이며, 인간의 노동은 더욱 추상화되며, 노동 가치에 대한 보상과 인정은 더 줄어든 사회로 변했을 뿐이다. 미래사회는, 우주쓰레기를 제거하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청소노동자인 주인공들의 삶은 결코 경제적으로 개선될 수 없는 구조가 지속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두 영화 모두 미래의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SF 서사로서 미래에 대한 추론적 모형을 제시하고 있는 두 영화에서 자본가는 과학기술을 사유화함으로써 국가라는 개념마저 무력화하는 권력을 갖게 된다.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승리호> 의 설리반 모두 과학기술을 정치적 권력으로 활용한 신적 힘을 지닌 자본가로 표현된다. 지구적 혹은 우주적 규모의 기업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멸종한 것이 분명한 국가를 대신해 국가처럼 시민들을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게 된다[5].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설국열차>는 이러한 과학- 자본-권력이 삼위일체를 이룬 집단과 이에 대항하는 세력의 충돌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있다. 하지만 인물들 모두 선과 악을 모두 가진 복잡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앞칸과 꼬리칸 어디에서건, 이미 멸망 이후의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상실하고 만다. 기차의 모든 존재가 야만적인 상태로 회귀하고 만다. 말하자면 영화 속 인물들은 보이는 대로의 존재가 아니다. 복잡한 욕망과 비밀들이 얽힌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커티스는 마지막에 이르러 남궁민수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다. 그는 꼬리 칸에 처음 탑승했을 때 배고픔 속에서 식인을 하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꼬리칸의 또 다른 영웅인 길포드도 마찬가지다. 그는 앞칸의 윌리엄과 공조해 꼬리 칸의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해 기차안 개체를 유지하도록 만든 인물이다. 윌포드와 공모해 꼬리 칸의 인구수를 적정 수준으로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진화의 과정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상황이다― 조절해 왔던 것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는 크로놀이라는 환각제에 취해 혼미해진 정신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처럼 재현되지만,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남궁민수만이 기차의 문을 상상하는 유일한 인물로 그려진다[3]. 그는 ‘인간의 멸종’이 예정된 세계에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묻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가 야만으로의 회귀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현재의 삶을 반성하는 추론적 계기를 제공하는지 점이다. 야만과 퇴행은 실제 자본주의 사회가 감춘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승리호>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설리반과 꽃님이라는 뚜렷하게 대립하는 선악 관념으로 단순화해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현실에 대한 비판은 완화되고 사회관계의 복잡성은 제거된다. 바로 그 점에서 SF 환상이 문화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손탁에 따르면, SF환상은 견딜 수 없는 따분함에서 대중을 구제해내며, 실제로 일어난 혹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공포를 잊을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SF 영화가 현실과 대립하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반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손탁은 SF영화의 환상이 세계를 미화하거나 중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9]. 이는<승리호>의 서사에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나노봇과 결합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설정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 미래사회의 비극은 선한 의지를 지닌 특별한 사람 안에서 그 가치를 결코 훼손당하지 않은 채 보존된다. 결국 영화에서는 이러한 꽃님이의 능력으로 지구의 재앙이 사라진다. 사막화됐던 지구도 다시 푸른 지구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인간 자신이 누구이며 인류 문명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2.4 주체의 의미: 인간 주체성과 사이보그 행위성

서사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서도 두 영화의 관점은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영화에서 재현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통해 좀 더 분명하게 논할 수 있다.

우선, <설국열차>는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전체주의화 된 디스토피아 사회에서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영화는 커티스의 반란 이전에도 두 번의 반란이 있었다고 설정한다. 가령 ‘6인의 반란’으로 명명된 사건이 있다. 이누이트였던 여성(요나의 엄마이자 남궁민수의 아내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으켰던 반란으로서 커티스의 반란이 있기 4년 전에 발생했다. 이러한 꼬리 칸의 역사에 대한 설정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멸망 이후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꿈을 꾸는 인간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는 갇힌 세상에서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보다 닫힌 현실일지라도 해방된 새 세상을 꿈꾸는 것이 더 값진 것임을 암시한다. <설국열차>의 멸망 서사는 역설적으로 자유만이 멸종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이는 전체 서사에서 인간의 멸종에 대한 시각이 새로워지는 부분이다. 인간의 진정한 멸종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지를 상실하는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실 열차를 지배했던 앞칸의 윌포드와 꼬리칸의 길리엄은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불멸성마저도 조정 가능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이다. 기차의 ‘인간의 서사’를 독점한다는 생각 속에서 살아가는 이 둘은 인간의 의지를 이용해 오히려 열차를 통제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체주의화 된 디스토피아 사회에서도 ‘커티스’와 ‘남궁민수’와 같이 조종할 수 없는 인간의 예상할 수 없는 행동들이 존재한다. 또한 윌포드가 엔진 칸에서 살아가는 가장 우월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이미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존재일 뿐이다. 그는 심지어 사회적 의복 자체를 벗고 실내복만 입은 채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이미 그 자신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음을 대변해준다. 게다가 권력의 최정점인 윌포드 역시 기차 엔진의 부속품처럼 자율적인 생각과 의지, 양심을 상실한 지 오래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 과정을 막고, 끊임없이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기차를 멈추게 하는 예외적 인물들이다. 커티스는 결국 티미를 엔진 부속실에서 꺼내기 위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었던 자신의 팔을 끊어내는 고통을 감내한다. 이러한 희생을 통해 비로소 커티스는 자신의 내부에서 멸종해가고 있던 인간의 의미를 회복한다.

이러한 멸망 이후 인간 서사에 대한 상상은, <승리호> 에서도 발견된다. 꽃님이를 구하고 죽을 결심을 하는 승리호 선원들의 결정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와 달리 <승리호>에서는 인간에 의한 구원이라는 해방의 서사가 아니라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인간) 와 나노봇이라는 최첨단 물질-기계가 또 다른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하는 인간-비인간(human-nonhuman) 서사를 구성한다. 즉, <승리호>에서는 인간의 행위성뿐 아니라 사이보그 행위성 또한 강조된다. 지구와 꽃님이를 구한 것은 물론 인간 자신이지만, 이들을 살리는 존재는 꽃님이라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포스트 휴먼 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비인간이 맺는 관계는 단순히 도구적 관계로 축소될 수 없다. <설국열차> 에서 사물들이 인간의 의지를 실현하고 설명해주는 상징적 기호로 사용되었다면, <승리호>에서는 비인 간이 인간의 도구나 기구가 아니라 인간 자신과 결합해 더 나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물질로 그려진다. 또 때로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존재로도 묘사된다. 따라서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한 새로운 인간성과 자유의 지가 상상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승리호>에서 이러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진지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락적 의미에서 감각적 경험이 더 강조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실의 모순은 완화되고 미래사회 역시 미화될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손탁은 SF영화가 예술의 가장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인 재앙을 다루곤 하지만, SF영화에서 재앙이 밀도 높게 그려지기보다는 그것을 외적으로 확대하는 데 치중한다고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9]. 말하자면 SF영화는 파괴와 폭력을 무정하면서도 심미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과학기술의 관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승리호>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Ⅳ. 결 론

이 논문은 <설국열차>와 <승리호> 두 편의 영화에 반영된 가상의 미래에 대한 인식 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두 영화를 비교한 것은 인류 멸망이라는 재앙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SF영화로서 전형적인 미래 디스토피아-유토피아 서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재앙의 상상력과 서사전략은 현재 인류사회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와 위기 상황과 분리될 수 없다. 현재 문화대중 사이에 자리한 지구환경위기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두 영화 모두 중요한 서사의 토대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본 논문은 인류세 담론과 영화적 실천의 가능성에 주목해 논의를 전개했다.

그 결과, <설국열차>와 <승리호>에 재현된 지구온난화와 사막화된 미래사회의 풍경은 사실상 현재 보편화되고 있는 인류세에 대한 문화적 대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영화에서 제시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는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 균열을 내면서 진정한 인간(문화)과 자연의 공존 방식은 물론 인간과 과학기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는 환경재앙의 원인이 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어떻게 영화적 재현과 성찰이 구성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한 두 영화의 서사전략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본 논문에서는 두 영화가 미래사회에서 구성될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제시하는지 고찰했다. 환경재앙으로 인류의 서식지인 지구 위에서 <설국열차>는 멸종 이후의 낯선 자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승리호>에서는 자연이 죽어버린 존재이거나 또는 과학기술로 되살린 에코 토피아로 그려지는 이분법적 시선이 존재했다.

또한 <설국열차>가 성냥과 산업폐기물과 같은 오브제를 활용해 과학기술에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서사의 중심이 놓았다면, <승리호>에서는 인간과 과학기술의 새로운 물질(나노봇)이 결합한 포스트 휴먼적 상상력을 활용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에 대해서는 <설국열차>와 <승리호> 모두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이다. 다만, <설국열차>는 보다 복잡한 선악적 구도 속에서 인물의 의지 작용을 중심으로 현실에 대한 전복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지만, <승리호>는 선악의 단순화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경향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설국열차>가 멸종의 시나리오 속에서 멸종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을 때, <승리호>는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의 연합을 통해 행위자의 범위를 사이보그적 행위성으로서의 인간-비인간의 융합 영역으로 확대했다. 이 점에서 두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류세라는 지구적 위기 담론 지형 속에서 SF영화가 미래를 상상하고 조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 자체로 미래에 존재해야 할 새로운 정치와 윤리를 상상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을 확대하기 위해 앞으로 더 다양한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인류세의 SF영화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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