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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철도부설과 읍성해체에 따른 도시공간구조와 주변 필지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Urban Spatial Structure and Transformation of circumjacent Lot by Course of the Construction of Railroads and the Dismantlement of Eupseong in the Early 20th Century

  • 투고 : 2018.06.14
  • 심사 : 2019.04.02
  • 발행 : 2019.04.30

초록

Considering the situat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when the existing urban system centered on urban areas began to change, the biggest factors causing urban structural changes in urban areas are construction of railroad and urban dismantling. The change process of Eupseong, in the microscopic viewpoint, can be understood as a process of change in the course of dismantlement of town's demarcation, improvement of accessibility and urban expansion due to the construction of railroads, process of urban expansion following the crumbling boundaries and structural changes. This study aimed to look at the transformation process of the Eupseong in the early 20th century, focusing on the demolition of the castle and the railway construction from a microscopic point of view of city.

키워드

1. 서론

조선의 읍성은 읍치와 방어, 구획 등의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읍성의 성곽이 도시의 확장을 방해하고 물리적 단절을 야기하는 방해물로 인식하면서 해체 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당시 근대적 교통시설인 철도의 개통으로 인한 일본인들의 급속한 유입, 신도로의 생성과 도시구조변화 등은 도시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읍성의 해체와 전통적인 읍성도시의 변화과정에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읍성의 해체로 인한 신도로의 생성과 교통수단의 발달, 새로운 도시계획과 가로체계의 등장 등은 도시공간구조의 변화로 이어졌으며, 필지단위의 변화부터 가로구조의 변화, 도시단위의 구조변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본 연구는 전통적인 읍성도시가 현재의 도시로 변화는 과정의 시발점이 되는 20세기 초반의 철도부설과 읍성 해체에 따른 읍성의 도시공간구조의 변화 과정에 주목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도시조직의 최소 규모인 필지의 변화에 주목하여 도시조직과 도시구조의 변화 관계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초기 기존의 읍성 중심의 도시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때, 읍성의 도시구조적 변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철도부설과 읍성해체1)을 들 수 있으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읍성도시의 미시적 관점에서의 변화과정은 읍성의 해체로 읍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의 변화2), 철도의 부설로 인한 접근성의 향상과 도시 확장으로의 전환단계에서의 변화3), 허물어진 경계와 구조적 변화에 이은 도심 외부로의 확장4)이라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성곽해체의 영향으로 생겨난 신도로 주변 필지변화로 이는 기존의 다른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던 필지가 새로 생겨난 도로를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5)이다. 둘째, 철도부설의 영향으로 철도와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생겨난 신도로 주변의 필지변화 과정이다. 셋째, 기존 가로구조가 성 밖으로 확장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형성된 가로의 주변필지의 변화이다.

본 연구는 앞에서 언급한 변화과정에 주목하여 20세기 초반 읍성도시의 변화과정 초기에 성곽의 철거로 인한 읍성의 해체와 철도부설을 중심으로 읍성의 변화과정에서 나타나는 미시적 관점에서의 변화를 살피고자 하였다. 본 연구에 사용된 지적원도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지적원도를 기반으로 한 문서자료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여 사용하였으며, 도시의 필지조직의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언급된 사례들은 읍성의 해체와 철도의 부설이 동시에 읍성의 변화에 작용한 사례6) 중 일부를 활용하였다.

2. 성곽해체의 영향으로 생겨난 신도로 주변의 필지변화

당시 읍성의 성곽은 제국주의 정책 실현을 위한 일본의 한국종관철도 계획에 많은 걸림돌이 되는 장벽으로 여겨졌으며, 필히 제거해야하는 장애물이었다. 수송의 원활함을 위해 지속적으로 철도를 늘리면서 대도시와의 접근성 향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읍성의 성곽이많은 방해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일본은 병참사업에 반하여 조선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어온 읍성을 20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훼철하기 시작하였다. 성곽의 철거는 전통적인 도시구조를 급격하게 바꾸었다. 기존의 도시구조는 읍성의 성곽을 기준으로 내외가 분리되어 전혀 다른 공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읍성의 해체는 기존의 공간구조를 급격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변화하는 공간구조에 맞추어 도시조직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7)

현재 대구의 북성로는 당시 북쪽 성곽이 해체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 중 하나로 철도역사8)와의 접근성이 가장 좋은 대로이다. 당시 철도를 통해 대구로 유입되는 일본인들이 자리 잡은 주거주지이자 대구의 최대 상업가로로 성장한 북성로는 그 필지의 변화도 다른 지역보다 빠르고 과감하게 일어난다.

읍성 해체 초기에 성벽으로 단절되어 있던 당시의 원정통(지금의 북성로) 가로변의 필지들은 성곽을 중심으로 생겨난 안과 밖의 차이를 필지의 크기9)와 활용도 등의 특성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성곽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읍성 안의 필지와 읍성 밖의 필지는 그 크기나 특성들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후 일본의 비호와 철도와의 접근성 등의 이유로 대구의 최대 상업 거리로 발전한 북성로 일대는 동일 영역으로서의 변화과정을 겪었다. 발전된 상업가로로서의 특징인 전면폭이 짧은 세장형 필지로의 분필10)과정과 함께 기존의 필지방향성과는 무관하게 북성로를 중심으로 직각으로 분필하는 방향성을 형성해 간다.11) 또한 북성로를 기준으로 안과 밖의 필지의 규모가 비슷해져가는 과정도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들을 보았을 때, 오랜 시간 단절되어 있던 필지들이 읍성 해체 이후 동일영역으로 인식되면서 기존의 도로조직과는 무관하게 비슷한 방향성으로 가지고 그 변화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읍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읍성의 해체 이후 성벽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생겨난 도로의 주변 필지는 유사한 변화과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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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11년 북성로의 대형필지

(출처 : 저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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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29∼1945년 대구 북성로

(출처 : 저자 작성)

표 1. 1911년(明治44年) 원정통 가로변 필지의 전면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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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일제강점기 대구시 필지상황 추적과 주변필지변화에 관 한 연구: 북성로를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46쪽 인용)​​​​​​​

상주의 경우, 읍성이 해체되기 시작한 1913년부터 읍성 성곽이 존재하던 주변필지들도 변화를 겪게 된다.12) 상주는 해자가 존재하던 성곽으로 대구읍성과는 다르게 상 안팎의 경계가 성곽의 확대 영역인 해자를 포함한 성곽시설임을 당시의 지적원도를 보면 알 수 있으나, 성곽이 해체된 자리에 대로를 만들고 해자부분은 메워 샛길을 만들면서 기존의 성곽이 있던 대로를 중심으로 조직구조가 변하기 시작한다.13)

해자와 성곽사이에 존재하던 필지들은 성 밖의 필지들과 같은 구역을 이루는 형상을 보이고, 각 해자의 귀퉁이 부분은 해자의 흔적조차 사라지며 완전히 같은 구역으로 편입되어 동일 구획을 형성하게 되며, 성곽 해체로 생긴 신도로를 중심으로 양측 필지는 동일영역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답습하였다.14) 특히 서문사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서쪽 성곽과 해자가 존재하던 거리는 상주의 최대번화가로 발전하면서 해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대로(현재의 상산로)를 기준으로 필지방향선을 동일 방향으로 맞추는 형상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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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913년 상주 북벽 방향 지적원도

(출처 : 저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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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현재 상주 서성동의 지적도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이처럼 읍성의 해체는 그 시설이 가지는 경계와 보호의 역할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공간의 단절이 사라진 후 한 공간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즉 동일영역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성곽의 철거에 계획적 의지가 삽입되었더라도, 이후의 과정은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3. 철도부설의 영향으로 생겨난 신도로 주변 필지변화

읍성의 도시구조 변화에 가장 밀접하고 커다란 요소 중 하나인 철도부설은 읍성도시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도심의 가로구조 변화를 야기하며, 당시 도시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철도부설로 인한 역사의 건설은 기존의 읍성 내부와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새로운 도로 생성에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읍성의 경계가 되는 성곽의 철거되고 철도가 부설된 읍성의 경우, 철도역사로의 접근이 용이한 신도로의 생성과 함께 도시구조의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기존의 도시구조와는 상이한 변화는 관련된 주변의 도시조직 변화와도 상관관계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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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938년(소화13년) 남원의 지형도와 도로구조

(조선총독부, 일만분일 조선지형도집성, 백서방, 1985, 84쪽 인용)​​​​​​​

남원의 경우, 철도역사가 읍성의 북문에 위치하고 철로가 북문-서문을 잇는 형태로 부설되면서 읍성의 도시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읍성의 해체 과정15)속에서도 전통적인 격자형 도시구조를 유지해오던 남원읍성의 필지상황은 동서남북문은 잇는 동-서 가로와 남-북 가로를 기준으로 크게 4분할 할 경우, 읍성 내 서쪽 지역에 대형필지가 사용하는 행정시설들이 주로 위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민가가 주를 이루는 소형필지들이 대부분은 형성한다. 동-서 가로의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부근 지역에 객사(당시 객사, 현 용성초등학교)와 동헌(군청, 현 남원시의회), 향청(현 남원우체국), 남원보통학교(현 남원하늘중학교), 성내장시(당시 남원도립병원, 현 남원교육문화회관 일대) 등이 대형필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정시설들의 북서쪽으로는 대부분이 경작지로 이루어져 성 내의 그 입지적 위상을 고려해 보았을 때, 성벽을 통과하여 성내로 철도를 지나게 할 경우 기존의 행정시설과의 접근성과 지가, 공사의 용이성, 조선인의 반발 등을 반영하여 지금의 위치가 가장 적당하다는 판단16)을 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읍성 북문에서부터 용성관(당시 객사, 현 용성초등학교)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현 광한북로)은 철도의 형성 이후 철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존의 도시구조와는 다른 양상의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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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남원의 지적도​​​​​​​

A : 객사(당시 객사, 현 용성초등학교), B : 성내장시(당시 남원도립병원, 현 남원교육문화회관 일대), C : 향청(현 남원우체국), D : 남원보통학교(현 남원하늘중학교), E : 동헌(군청, 현 남원시의회)​​​​​​​

기존의 행정시설들이 위치한 대형필지는 유지되었지만 나머지 필지조직은 세분화가 진행되었으며, 그 방향성은 기존의 격자형 방향과는 무관하게 철로를 기준으로 새롭게 생겨난 도로와 반응하였다.17) 또한 철로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섬처럼 단절된 지역은 현재까지도 발전이 더딘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이 지역은 철로의 남동쪽의 변화된 도시구조와는 반대로 도로조직의 변화도 크지 않고 세분화 과정만 조금 진행되었을 뿐 필지조직의 방향성 또한 거의 변화하진 않아 도시구조의 변화과정에서 얼마나 소외되어 왔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대구 중앙로는 1916년 공사가 진행되어 1917년에 준공한 대구역과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신도로이다. 북성로의 북동쪽에 위치한 대구역사에서부터 시작해 기존 읍성 내부의 도시구조를 무시한 채 철로와 직각을 이루며 읍성을 관통하며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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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1937년(소화12년) 대구의 지형도와 도로구조

(조선총독부, 일만분일 조선지형도집성, 백서방, 1985, 69 ∼70쪽 인용)​​​​​​​

중앙로의 개통과 확장은 기존 도시의 가로구조의 변화와 함께 도시조직을 구성하고 있던 필지들의 분합과정을 주도하였으며, 이는 성곽 해체 이후 읍성 내 변화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철도부설 이후 철도와 평행 직각 방향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가로들은 기존 읍성 내에 형성되지 못하고 성곽을 기준으로 외부 지역에 위치하게 되는데, 중앙로는 읍성 내부의 가로 구조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신도로들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신도심의 중심가로로서의 위계를 형성하여 대구의 이중적인 도시구조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18) 변화초기 도로 건설을 위해 분필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는 도로면적 확보를 위한 분필로, 실질적으로 분필이 일어나고 도로로 사용되지 않는 남은 필지는 규모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활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주변의 필지들과의 합필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활용도가 떨어지는 필지가 생성되는 이유는 기존의 필지선과 새로 만들어지는 중앙로의 도로면적 확보를 위한 분필의 방향성이 맞지를 않아 삼각형 형태의 무용의 필지들이 다수로 생성되기 때문으로 <그림 8>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일련의 분합과정이 중앙로 주변필지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필지선의 방향이 새로 만들어진 중앙로와의 관계성을 형성하게 되면서 중앙로와 직각 방향인 필지조직으로 변모해 갔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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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대구 중앙로​​​​​​​

(이미선, 근대기 대구 읍성의 필지변화 연구: 중앙로를 중심 으로 ,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29쪽 인용)

기존의 읍성의 성곽과 대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가로구조는 성곽 해체 이후 현재의 사성로와 국채보상로 등으로 대체, 확장되면서도 그 방향이나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또한 기존의 필지 또한 가로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여 세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필지의 방향성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로의 등장은 인접한 필지들과 그 필지들이 속한 인접 구역들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로를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가로들은 읍성의 동쪽 성벽의 해체 후 들어선 동성로와는 다른 방향성을 추구하면 형성되었다. 중앙로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형성되는 신도로들은 동성로와 교차하는 가로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읍성의 방향과 일치하는 동성로의 영향보다는 중앙로와 직교하며 읍성의 외부도로와 확장을 꾀하는 모습을 보인다.20) 필지의 변화 또한 인접 가로의 형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세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방향성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철도의 부설로 인한 신도로 생성은 철도의 설치 목적과 부합하는 일이기에 접근성과 효율성 등의 여러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적용하여 그 위치나 형태를 결정한다. 또한 설치의 의도와 그에 따른 기대효과는 기존의 도시구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더라도 철도부설 계획이 이행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부설된 철도와 역사에 연결된 신도로는 그 기능이 명확하다. 기존의 가로구조에서 새롭게 유입된 교통수단과 접근성 향상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소 과격하게 보일 수 있는 과정21)을 거치게 된다. 과감한 필지의 분필과 합필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려 변화를 이어가는 필지의 변화보다 급격하게 이루어지며, 교통수단과의 접근성 향상으로 만들어지는 인구유입과 경제력 향상은 상업 가로로의 번영과 동시에 더욱 급격한 필지단위의 변화를 촉진하였다. 2장에서 언급한 읍성해체 이후의 동일 영역 형성 과정 속에서의 필지변화는 읍성해체와 신도로 생성이라는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신도로가 기존의 성곽자리를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로구조 변화 과정은 빠르게 일어나지만 차후 발생하는 필지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철도와 역사로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기존의 도시구조 위에 새로운 도로를 생성하는 경우는 도로 부지의 매입부터 분필과 합필이 기본적으로 정리된 이 후에 신도로 건설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볼 때, 해당 필지의 변화는 거의 도로의 생성과 동시, 혹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시작되는 목적과 형성되는 과정, 변화하는 시간과 계획의 개입 등은 확연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4. 도심의 확장으로 인한 도시구조 변화로 형성된 가로의 주변필지변화

도심의 확장은 읍성의 경계가 사라지고 도시화를 거쳐 현대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폭발적인 도시로의 인구유입과 증가하는 주거 문제, 상업가로의 형성 등은 도심의 확장을 유발하고, 근대교통시설의 설치, 신도심의 형성, 가로구조의 변화 등의 복잡한 여러 요소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많은 파생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기존 읍성이 위치한 도심의 확장과, 새로게 조성된 도심의 확장으로 인한 원도심과 신도심의 간섭관계라 하겠다. 이러한 변화는 2장과 3장에서 언급한 도시구조의 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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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상주의 지적도​​​​​​​

상주는 남원, 경주와 같이 계획된 격자형 구조로 형성된 도시로 추측되며, 조선시대 감영이 위치할 정도로 중요한 입지를 갖춘 도시였으나 근대화과정 초기 경부선의 개통에 참가하지 못한 이후 도시적으로 정체에 길에 접어들게 된다. 1924년 철로가 설치되지만, 이미 도시의 발전과정에서 동력을 상실하고 답보상태만을 이어오던 도시구조에 획기적인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도심의 형성이나 도시구조의 변화를 꾀하지 못하고 외부적으로는 기존의 도시구조를 확장하고 내부적으로는 늘어나는 인구에 맞추어 필지를 세분화하는 과정에 치중하게 된다.

1912년 읍성 해체 이후 철도의 개설까지 기존의 격자형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도심확장과 기존 도로의 개수 등이 이루어지면서 철도 개설 이후에도 이미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유지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성곽은 해체 이후 대로로 사용되었고 해자는 메워져 대로 이면의 샛길로 활용되었다. 기존의 격자형의 도로와 연결되고 더욱 도로가 확장, 정비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리라 추측된다.22)

북문과 남문을 잇는 대로를 중심으로 동헌과 감영이 나누어지고 동헌의 앞으로 서문으로 이어지는 ‘ㅓ’자형의 기본 도로구조는 읍성 해체 이후 예전에 감영이 있었던 대형필지를 분필하고 동문으로 잇는 가로를 형성하여 지금의 ‘十’자형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당시 성내 필지는 대부분 행정과 군사적 목적의 필지들이 대형 필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림 10>의 지적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은 성곽의 해체 이후 도심으로의 집중으로 인해 지속적인 분필이 이루어졌으며, 세분화되는 과정에서 그 방향성은 필지들이 인접한 직선화된 대로를 기준으로 형성되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상주 도심의 도시구조는 기존의 격자형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철로의 개설에도 불구하고 거의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형필지들이 세분화되는 과정에서도 확장해 가는 도시의 공간구조 변화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사료된다.24) 다만 철도의 부설 이후, 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접한 구역들과 그에 속한 필지들은 기존의 방향과는 다른 형태로 미시적 변화에 동참하고 있으나, 새로운 도심의 형성이라는 구심점을 가지지 못하고 실질적으로는 상주의 심리적 경계선을 형성하는 역할로 한정되고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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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상주의 지적도​​​​​​​

(A : 동헌, B : 객사(현 경북상주 경찰서), C : 대동창)​​​​​​​

순천은 북문이 있던 로터리(현 전남순천의료원 앞) - 성동오거리 – 장천사거리(현 순천종합버스터미널과 경전선이 만나는 부근)와의 연결도로인 강남로가 기존 시가지와 신시가지26)를 연결하는 신도로로 만들어진다. 신도로27)가 생기는 경우 대부분의 대로에 접한 필지의 경우에는 분필과 합필의 과정에서 접한 도로의 방향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전남순천의료원 앞 로터리 - 성동오거리로 연결되는 강남로의 경우에서 새로운 대로의 생성으로 근접한 필지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기존 읍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관계로 근접한 필지를 제외하고는 기존의 형식을 답습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존의 읍성의 흔적을 완전히 붕괴하지 아니한 상태로 도로의 형성이 이루어졌으며, 그 위치 또한 북-동문의 일부분만 간섭하는 형태로 읍성내부로의 영향은 크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성동오거리 – 순천종합버스터미널과 경전선이 만나는 부근인 장천사거리와의 연결도로인 강남로는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순천동천과 동천으로 부터 갈라져 나온 지류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토지가 논으로 활용되던 지역에 철로와 버스터미널 등의 교통시설과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신도로의 생성은 기존 읍성도심의 확장의 영향을 벗어나 새로운 또 하나의 도심을 만들었다. 이는 대구의 지역 내에서 두 개의 구조적으로 다른 신 구도심이 시대에 따라 켜를 달리하여 쌓이는 이중적인 형태가 아닌, 철도, 터미널과 같은 교통시설의 형성으로 인해 새로운 도심이 다른 지역에 생성되고 서로 확장을 거듭한 결과 2개의 도심이 나란히 형성되어 서로 접하는 지역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형상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신도심의 주변필지의 경우 대부분이 논으로 구성된 대형필지로 기존의 읍성과 동천, 동천의 지류 등의 영향을 받아 자유롭게 분할되어 있던 지역에서 철도부설의 영향으로 신도심 형성을 위한 격자형 구조로의 일차적 변모가 일어난다. 이후 신 구도심의 확장과정에서 기존의 읍성지역에서 철로와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접근도로가 형성되며, 지금의 순천시청과 그 주변 도로들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기존의 가로구조 위에 새로운 가로구조가 혼재하는 지역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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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현재 순천의 지적도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기존의 격자형 구조에서 새롭게 생긴 신도로 주변필지만 도로생성을 위한 지속적인 분합과정을 거쳐 기존의 필지조직구조와는 상이한 방향성을 형성하는 이차적 변화과정이 일어난다. 특히 남교오거리에서 순고오거리로 이어지는 중앙로와 성동오거리에서 장천사거리로 이어지는 강남로는 순천동천으로 인해 갈리진 순천역으로의 접근성이 가장 좋은 신도로로, 이는 기존의 격자형 도로와는 다른 형태인 대각선 형태의 도로로 개설되어 있으며, 두 도로의 주변 필지들은 기존의 읍성의 필지들의 방향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순천시청을 중심으로 하는 두 도심의 접경지역은 기존의 구도심의 확장성을 간직한 도시구조에 이후 접근성을 강조한 신도로의 생성으로 인한 도시조직이 충돌하여 <그림 12>에서 나타나는 혼합적이고 복합적인 필지조직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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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순천의 지적도​​​​​​​

앞선 3장에서 언급한 대구의 중앙로와 순천시청 일대의 필지변화를 살펴보면, 기존의 도로구조와 필지조직 위에 철로와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신도로 생성 과정이 변화의 시작으로 그 목적이 유사해 보인다. 도로 부지의 확보를 위한 지속적인 분필 이후 도로 부지를 제외하고 남겨진 자투리 필지들은 주변의 필지와 합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련의 분합과정이 이어지면서 대로와 맞닿는 필지들은 필지선의 방향을 대로와 직각을 이루도록 변화를 꾀하게 되고, 변화 과정에 세분화 과정이 더해지면 필지의 방향성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다만, 이 과정은 대부분 계획적으로 형성되는 신도로의 생성으로 인한 것이기에 직접적인 간섭을 겪는 해당 필지들과 합필과 세분화 과정에 영향을 받는 주변의 필지들에서만 주로 일어나며, 근처의 기존 필지들의 변화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사료된다.28)

반면, 순천시청 일대는 일반적인 계획적 신도로의 형성과정 이후, 읍성 내부에서의 구조적 변화가 아닌 외부로의 확장과정에서의 필지변화 양상이 주된 변화의 과정이다. 또한 상주와는 다르게 역사의 위치가 순천동천 건너에 위치하면서 주변이 신도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도심 내부에서의 가로구조 변화와 미시적 변화가 아닌, 도심이 외부로 지속적으로 확장하여 원도심과 신도심의 경계가 순천시청 주변에서 강남로를 따라 만나면서 도시조직 간의 간섭이 일어난다. 도심의 확장에 따른 이러한 경계지역은 두 도심의 간섭 상황 뿐 아니라, 기존 도심의 일반적인 확장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의 확장 이후 나타나는 형상으로 이해되며, 도심의 확장, 경계영역 형성29), 안정화, 확장의 순으로 답습과정을 거치면 확장해 간다.

5. 결론

전국적으로 존재하던 조선의 읍성은 일본에게는 식민도시건설과 군사적 목적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되었다.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근대교통시설의 발전과 근대도시로의 변화라는 명분 아래 읍성은 1910년대를 기점으로 대부분 해체과정을 겪는다. 철도의 개통과 시구개정사업, 도시정비계획 등 관 주도의 사업들과 그에 따른 급격한 유입인구 증가와 근대적 설비시설의 정비 등은 읍성의 해체 이후 도시화 과정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특성이다.

본 연구는 1910년대 이후 도입된 철도의 부설과 도시화 진행 과정 중 철거된 읍성이 기존 읍성도시의 가로구조에 미친 영향과 도시구조의 변화에 따른 미시적 변화, 즉 도시조직 내의 필지 단위 변화와의 관계에 대한 알아보고자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도시의 대응 양상은 당시 조선의 읍성도시가 도시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도심의 확장과 변화과정에 주목하여 나눈 것으로, 이는 철도의 개통의 영향과 읍성해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엄청난 요인들의 결합이 파생시킨 도시의 변화 과정이다. 도시구조의 변화가 미시적 도시조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크게 3가지로 살펴보고, 각 단계가 주변 필지 변화와 형성하는 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성곽은 읍성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방어시설로서 역할을 했지만, 도시화 과정에서 확장을 방해하는 단절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었다. 성곽의 제거는 전통적인 도시구조에 순환도로를 형성하게 되며, 성곽으로 인한 단절이 사라지면서 기존의 성벽의 안과 밖에 접한 도시조직이 동일영역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성곽의 철거가 도시구조의 변화에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지만, 이후 주변에서 일어나는 동일영역에서의 필지 변화와 확장 과정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생각된다. 두 번째 변화과정은 철도와 역사의 부설로 파생된 신도로의 영향으로 변화하는 도시조직 변화이다. 역사와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생성된 신도로는 건설과정이 전자와는 다르다. 이미 형성되어있는 필지들을 도로부지로 확보하고, 도로형성을 위해 지속적인 필지의 분합과정을 거치며 형성되기에, 이러한 변화는 아주 급진적이고 신속하게 발생한다. 또한 도시조직의 변화가 도시구조의 변화보다 선행, 혹은 동시에 일어나야 가능하기에 그 과정에서 전자와 차이점이 확실하다 하겠다. 앞의 두 사례가 시기적 기점을 확실히 두고 발생하는 반면, 마지막 변화과정은 경계의 붕괴 이후 동일화 과정과 확장의 개념으로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이다. 또한 외부로의 도심의 확장이 주변에 발생한 신도심의 확장과 만나게 되면 서로의 간섭으로 인한 경계면을 형성하게 되고 이는 필지들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시구조의 변화는 도시조직의 최소단위인 필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당신의 변화과정에 대한 기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존재하고 있다. 도시화 초기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셀 수 없이 많고 또한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읍성 도시화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철도부설과 읍성해체를 중심으로 당시의 변화과정을 알아보고 도시조직의 변화 과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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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대중, 조재모, 일제강점기 철도부설에 따른 읍성도시의 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33권, 10호, 2017, 6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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