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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성정각의 건축 시기와 건축 구조

The Construction Period and the Structure of Seongjeonggak Hall, in Changdeokgung Palace

  • 이종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 투고 : 2018.11.27
  • 심사 : 2019.02.09
  • 발행 : 2019.04.30

초록

Seongjeonggak Hall in Changdeokgung Palace, although built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displays the architectural style and structure of Early Joseon period. It did not include ondol (Korean floor heating system) and contained Early Joseon style window frames. Later, King Jeongjo installed ondol as he repaired the building into a more convenient office. The initial construction of Seongjeonggak Hall was based on the architectural ideology of the Early Joseon Period, which divided up the space according to the season. Thus, the initial structure of the building consisted of a joint of a one-story building and a two-story building with the top floor of the latter specialized for hot and humid season. The two-story building was called 'chimnu(寢樓)', and its top floor was called 'nu-chimsil(樓寢室)'.

키워드

1. 서 론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조선후기에 중건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전 중반에 중건한 반면, 경복궁은 19세기 후반에 중건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전기 궁궐 건축에 대한 기억이 유지된 시기에 중건했다는 점에서 경복궁에 비해 조선전기에 유행한 양식과 구조를 적용해서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17세기 전·중반에 건립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개별 건물을 분석하면 해당 건물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조선전기 궁궐 건축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고에서는 창덕궁 ‘성정각(誠正閣)’의 건축 시기와 구조적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현존 성정각 건물은 건립 시기가 오래되었고, 건축 구조가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세자와 관련된 공간이라는 개설적 언급만 있을 뿐, 건축 시기나 구조적 특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1)

본론에서 살피겠지만, 현재의 성정각 건물은 17세기 중반 이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재의 양식이나 건축 구조의 측면에서도 조선 전기적 특징으로 판단할 수 있는 요소들이 강하게 확인된다.

본고에서는 우선 문헌자료를 살펴 성정각의 창건 시기를 판단하고 정조 때의 수리 이력을 확인하겠다. 수리 전후 성정각의 용도도 확인하겠다. 이어 건축 양식과 구조를 분석하여 현재의 성정각 건물이 조선전기에 유행한 구조를 간직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 구조와 여기에 적용된 건축 관념을 도출해 보겠다.

2. 기록에서 확인되는 성정각의 이력과 용도

2-1. 숙종대 이전의 건축 이력과 용도

현재 ‘성정각’은 단층과 중층이 결합된 건물 전체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층부 다락의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현판이,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현판이 걸려 있다. ‘성정각(誠正閣)’이라는 명칭은 『승정원 일기』의 1697년(숙종 23) 12월 13일자 기사에서 처음 확인된다.2) 그리고 1704년에 세자시강원의 궁료 김보택이 지은 ‘성정각명(誠正閣銘)’에서는 ‘성정각’ 명칭이 성립한 계기가 확인된다.

하늘과 선대 임금들이 도우셔서 우리 성상(숙종)께서 우리 왕세자(경종)를 낳았습니다.…서연(書筵) 때에 임하는 작은 각[小閣]은 옛날에는 이름[號]이 없고 다만 ‘강학청’ 이라고 칭했습니다. 우리 전하[숙종]가 비로소 ‘성정(誠正)’이라고 명하시고 이내 글씨를 베풀어 편액을 주셨습正)’이라고 명하시고 이내 글씨를 베풀어 편액을 주셨습를에 늘 여기에서 머물고[興居於是], 여기에서 강독합니다.…갑신년(1704) 10월 일에 사서(司書) 김보택이 지어서 들이다.3)

위 기록에서는 성정각이 왕세자의 서연이 열리는 곳이자 세자가 거처하는 곳이었음이 확인된다. 숙종이 ‘성정각’으로 명명하기 전에는 관행적으로 ‘강학청(講學廳)’으로 불렸음도 확인된다. 따라서 ‘성정각’은 숙종이 창건하면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 기존 건물에 숙종이 부여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건물이 ‘강학청’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은 성정각의 창건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조선에서 ‘강학청’은 원자 교육을 위해 설치한 기관을 뜻한다. 원자가 유아일 때에는 보양청을 설치하고, 초보적인 한문 교육이 가능한 나이가 되면 강학청을 설치하여 교육하였다.4) 원자가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면 강학청은 설치되지 않고, 시강원(춘방)에서 서연(書筵)을 열어 세자 교육을 담당하였다. 세자를 교육하는 장소는 서연청(書筵廳)으로 달리 칭하였다.

창덕궁을 중건한 이후 숙종 때까지 강학청은 인조와 현종 두 국왕에 의해 설치되었다. 인조 때의 강학청은 1624년(인조 2)에 처음 확인된다.5) 이후 1643년에 원손(元孫)이 강학하는 장소를 ‘강학청’이라고 표현한 사례도 확인된다.6) 그러나 1624년에 창덕궁 내전 영역은 대부분 소실된 상태였고 인조는 창경궁에 거주하였다. 1643년에는 경덕궁(경희궁)에 거주했고7) 원손의 부모는 청에 인질로 가 있었다. 인조가 설치한 강학청은 창덕궁과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현종이 5살 된 원자(숙종)를 위해 1665년(현종 6)에 창덕궁에 강학청을 설치하였다. 숙종 때에는 강학청이 설치되지 않았다. 1688년에 원자(경종)가 태어나자 1689년에 보양청을 설치하고 보양관을 선발하였다. 강학청의 설치는 후일로 미루었다.8) 그러나 1690년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강학청은 설치되지 않았다.

현종이 설치한 강학청은 후대에 최초의 강학청으로 인식되었다. 정조는 “숙종의 어린 시절에 현종이 보양관을 선발하라고 명령하고 ‘강학청’이라는썼다.”고 하였다.9) 따라서 ‘강학청’으로 불렸던 성정각은 강학청이 설치된 1665년(현종 6)에 원자의 강학이 이루어진 곳일 가능성이 크다.

원자(숙종)를 위한 강학청 설치를 논의할 때에 교육기관으로서의 강학청은 시강원에 설치하고, 강학할 장소는 그때그때 국왕(현종)에게 보고하여 정하기로 하였다.10) 그러나 이틀 뒤 현종은 강학청을 시강원에 두는 것은 너무 먼 것 같다고 하였다. 강학 장소에 대해서도 선정전 모퉁이에 서연을 열었던 곳이 있지만 그 곳 역시 먼 것 같다고 하였다.11)

현존하는 『강학청일기』에서는 9월 3일에 희정당의 ‘서별당(西別堂)’에서 원자와 스승의 상견례를 치른 것이 확인될 뿐 최종적으로 강학청이 설치된 곳과 강학이 이루어진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종이 언급한 내용으로 미루어 강학청은 시강원에 설치되지 않았고, 강학도 원자가 거주하는 내전을 기준으로 ‘선정전’보다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희정당의 ‘서별당’에서 상견례가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강학 장소도 희정당의 서별당과 인접한 곳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성정각의 위치는 이와 같은 조건에 잘 부합한다. 성정각은 희정당의 동남쪽에 인접해 있다. 5살의 원자(숙종)가 이동하기에 무리가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다. 성정각에서 원자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교육 기관인 ‘강학청’도 성정각 일곽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종은 강학청을 설치하기로 했던 시강원을 ‘멀다’고 지적하였다. [그림 1]에서 보듯 숙종 이전의 동궁 영역은 시민당 일곽이었고, 시강원(춘방)은 시민당의 동쪽에 인접하여 성정각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성정각에서 원자의 강학이 이루어질 것임을 고려하면, 시강원은 원자 교육기관인 강학청을 두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육기관인 강학청도 성정각 주변 건물에 설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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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성정각과 다른 건물들의 위치

따라서 현종이 설치한 ‘강학청’은 원자를 위한 교육기관이자 원자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뜻했다고 볼 수 있다.12) 그리고 원자(숙종)가 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숙종이 ‘성정각’이라는 정식 이름을 부여하기까지 이 건물은 계속 ‘강학청’이라고 불렸다고 볼 수 있다.

성정각이 이처럼 강학청이 설치된 1665년 이전의 건축임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성정각의 초창 시기는 인조, 나아가 광해군 때까지 올려 볼 수 있다. 1647년(인조 25)에 인조는 광해군이 1620년 이전에 건축한 인경궁의 전각을 헐어서 창덕궁으로 옮기는 한편 많은 건물을 새로 지었다.13) 이후 창덕궁은 장기간 국왕들의 상주처가 되었다. 효종과 현종 때에도 일부 건물을 철거하거나 신축했지만 대규모의 소실이나 영건(營建)은 발생하지 않았다.14) 따라서 1665년에 존재가 확인되는 성정각은 인조가 인경궁에서 옮겨 왔거나 새로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종 때에 원자(숙종)의 강학이 이루어졌던 성정각은 이후에도 왕세자가 학습하고 기거하는 장소가 되었다. 세자 시절에 경종은 성정각에서 독서하고, 국왕이 보낸 관리들에게 술과 음식[酒饌]을 대접하였다.15) 숙종은 ‘세자(경종)에게 주는 10가지 교훈[賜世子儆戒十箴]’을 성정각 동쪽 벽에 걸게 하였다.16) 영조도 이곳에서 독서했으며,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다.17)

이처럼 성정각이 17세기 전 중반에 건축되어 원자·세자의 교육 장소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성정각을 처음 지을 때에 조선전기에 유행한 양식이나 구조를 적용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성정각이 창건 당시의 양식과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면, 성정각에서 조선전기적인 건축 요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록에서는 정조가 성정각을 수리하여 상시적이고 편의로운 집무처로 사용한 것이 확인되므로 조선전기적인 건축 요소를 판단하기에 앞서 정조 때 이루어진 수리의 방법과 정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2. 정조 때의 수리 이력과 용도

정조는 세손 시절인 1771년 2월 3일에 ‘성정각’에서 열린 서연에 참석하였다.18) 영조는 경희궁에 상주하였고, 정조도 경희궁에 거주하며 존현각(尊賢閣)을 독서처로 삼았으므로19) 성정각에서의 서연은 일회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성정각은 1777년(정조 1)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약원제조 홍국영과 공조판서 구윤옥을 존현각에서 불러 보았다. 

나(정조)는 말하였다. “반드시 수리해야 하는 곳이 많은가?” 구윤옥이 말하였다. “낡고 기울어진 것이 심히 많아 형세가 모두 수리해야 합니다. 창덕궁부터 공역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는 말하였다. “자경당(慈慶堂)의 공역도 시작할 것인가?” 구윤옥이 말하였다. “역시 날짜를 가려서 시작할 것입니다.” 구윤옥이 말하였다. “성정각도 장차 수리해서 고쳐야[修改]겠습니다.” 나는 말하였다. “이는 전일 동궁의 처소이다. 수개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경비가 고민이니 무릇 수리하는 공역은 간략하게 하고 빠르게 마치는 것이 좋겠다.”20)

위에서 보듯 성정각은 창덕궁의 수리를 논의 하면서 언급되었다. 공조판서 구윤옥이 수리가 필요한 창덕궁의 건물에 성정각을 포함할 것을 건의하자 정조는 ‘동궁의 처소'라며 허락하였다. 정조가 세자의 처소로 인신학 성정각은 '수리해서 고쳐야[修改]’할 만큼 퇴락하고 거주에 불편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정각 수리는 정조가 특별하게 관심을 기울인 사안이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창덕궁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생모 혜경궁 홍씨가 거처할 '자경당' 신축에 있었다. 정조의 자경당에 대한 관심은 위 대화를 포함하여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쉽게 확인된다.21) 반면에 성정각을 언급한 사례는 수리를 논의할 때부터 완료할 때까지 3건에 불과하다. 게다가 성정각 수리는 창덕궁의 다른 건물에 비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1777년 3월 7일을 수리를 시작할 길일로 택한 기록에서는 자경당과 더불어 ‘경복전’을 언급하였다.22) 1777년 6월 7일에 창덕궁 수리를 완료하고 관계자를 포상한 기록도 공사의 성격을 ‘자경당의 영건으로 인하여 대내를 수리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23)

또한 정조와 구윤옥의 대화를 보면 성정각 수리는 정조가 먼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구윤옥의 건의에 기인하였다. 정조는 비용을 걱정하며 간략하고 신속하게 수리하라고 당부하였다. 정조의 당부대로 수리가 진행 되었다면 성정각은 외양이나 구조에 큰 변동이 없었을 것이다. 구조나 시설에 변동이 발생했다면 공사 실무자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서 ‘성정각’은 정조가 창덕궁의 수리한 건물을 돌아보고 관계자를 포상할 날짜를 6월 7일로 결정했을 때에 다시 등장한다. 정조가 그때까지 성정각 수리를 마칠 수 있겠냐고 묻자, 공조판서 구윤옥은 ‘어려울 것 같다[似未及]’고 답변하였다.24) 구윤옥의 답변과 달리 성정각 수리는 정조가 창덕궁을 돌아본 6월 7일 이전에 완료되었다. 정조는 1777년 6월 8일에 성정각에서 측근 신하 홍국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지난날 이 각의 수리를 시작하는데 비가 왔다. 이번에 공역을 마치는데 또 비가 왔다. 마땅히 ‘희우(喜雨)’라는 이름이 있어야겠다.” 홍국영이 말하였다. “진실로 우연이 아닙니다.”25)

정조는 성정각 수리를 시작할 때와 완료할 때에 모두 비가 내렸음을 강조하며 건물에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부여하겠다고 하였다. 현재 성정각에 ‘희우루’ 편액이 있는 것은 정조의 의지가 실현된 결과이다.

그런데 1782년(정조 6) 무렵 정조가 지은 「희우루지(喜雨樓志)」에서는 “나는 새로 지은[新建] 누를 ‘희우’라고 하였다.”고 하여 희우루를 정조가 새로 지은 것처럼 표현하였다. 또한 “정유년(1777)에 이 누를 중건(重建)하였다.”고 하여 사라진 건물을 정조가 재건한 것처럼 표현하였다.26) 그러나 이는 정조가 ‘희우루’로 개명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른 기록을 보면 희우루는 수리 전부터 성정각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상께서 성정각에 납시었다.…상께서 말하기를 “보춘루는 곧 옛날 보춘정(報春亭)을 수리하여 고친[修改] 것이다. 『점필재집(佔畢齋集)』과 『사가집(四佳集)』에 「보춘정기(報春亭記)」가 있다. 조윤형이 그 기문을 써서 걸고 편액도 구례에 의거하여 ‘보춘정’이라고 써서 걸어라. ‘희우루’ 세 글자도 역시 조윤형에게 쓰게 하여 동쪽 벽[東廂]에 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다.27)

앞에서 본 것처럼 정조는 성정각 수리를 완료한 직후인 1777년(정조 1) 6월 8일에 건물의 명칭을 ‘희우’로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보듯 정조의 결심은 5년이 지난 1782년에야 실현되었다. 이는 희우루가 정조가 창건한 건물이 아님을 알려준다. 창건했다면 완공 즉시 명명했을 것이다. 중건도 아님은 정조가 이 건물의 명칭을 ‘희우루’로 바꾸라고 한 표현에서 잘 확인된다.

정조는 「희우루지(喜雨樓志)」에서 “나는 새로 지은[新建] 누를 ‘희우’라고 하였다.”고 한 데 이어 “희우라고 이름 지은 그 정자는 오래된 것이다[喜雨而名其亭古也].”라고 하였다. 이는 정조가 ‘정(亭)’으로 표현한 이 건물이 ‘희우’로 명명하기 전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건물을 1777년에 중건 개념을 적용하여 새로 지었다면 건물의 분류는 ‘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보듯 정조는 1782년에 이 건물을 ‘보춘루’로 지칭하면서 보춘루는 옛날의 ‘보춘정’을 ‘수리하여 고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면 정조는 1777년에 중건 개념으로 ‘보춘정’을 다시 지으면서, ‘정’을 ‘누(樓)’로 바꿔 ‘보춘루’라고 명명했다가 5년 뒤에 다시 ‘보춘정’으로 환원하고 ‘희우루’라는 이름을 새로 부여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정조는 성정각의 수개(修改)를 공식적으로 완료한 바로 다음 날에 ‘희우’라는 이름을 부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므로 ‘보춘루’는 정조가 성정각을 수리하기 전부터 성정각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던 누의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보춘루’가 본래 ‘보춘정’이었다는 정조의 설명은 근거가 전혀 없다. 김종직의 『점필재집』이나 서거정의 『사가집』에는 “보춘정기”가 없다. 두 문집에는 창경궁의 「환취정기(環翠亭記)」가 있다.28) 『점필재집』과 『사가집』, 나아가 어느 기록에서도 “보춘정기”는 물론 ‘보춘정’도 궁궐 건축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옛날의 ‘보춘정’을 수리해서 고쳤다는 정조의 설명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면, ‘희우루’로 명명하고자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보춘루’는 본래 성정각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으므로 정조는 이 누에 새 이름을 부여하기 어려웠다.29) 이에 정조는 착각이나 왜곡에 근거하여 기존의 ‘보춘루’를 ‘보춘정’으로 고침으로써 ‘희우루’라는 이름을 새로 부여할 수 있었다. 기존의 이름인 ‘보춘’을 보존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희우루지」의 ‘신건 중건’은 정조가 기존 건물에 새 이름을 부여한 것을 강조하고자 과장하여 표현한 것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정조 때의 성정각 수리는 보춘루를 포함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던 건물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수리를 완료한 뒤 정조는 성정각을 애용하였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편의로운 접견과 논의, 경연 등을 이곳에서 행하였다. 정조 사후에도 성정각은 국왕의 일상적인 집무처로 이용되었다. 이렇듯 성정각이 국왕의 공간이 된 것으로부터 정조 때의 수리는 국왕의 집무 기능에 적합한 변화를 가져왔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단층과 중층이 결합된 기본 구조는 유지했지만 국왕들이 성정각을 집무처로 선호하게 만든 변화 또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성정각은 초창 때에 적용된 조선 전기적 건축 양식이나 구조와 더불어 정조 때 추가된 조선 후기적 건축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는 건물이 된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성정각의 난방 관련 요소, 창호 양식, 위치와 구조, 단층부에서 중층부 상층으로의 진입 방식을 살펴서 확인하겠다.

3. 성정각의 건축 구조

3-1. 현존 성정각의 양식과 구조

(1) 난방 관련 요소

현재의 성정각은 단층부와 중충부의 매개 공간인 아궁이칸을 제외하면 8칸의 단층부와 2칸 반의 중층부가 직교하고 있다. 중층부 하층은 개방되었고, 상층은 분합문을 달아 외부와 차단하였다. 단층부의 평면은 [그림 2]와 같이 온돌방과 마루 구조의 ‘청(廳)’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칸을 제외하면 온돌방이 세 칸이고 청이 한 칸이어서 온돌이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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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현 성정각 단층부의 평면 구성 (도면출처: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A0026337, 창덕궁 희우루 문간채 약방 보수공사도면, 1997)

조선전기 궁궐에는 온돌이 제한적으로 시설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중건하거나 창건한 궁궐에는 온 돌이 전면적으로 시설되었다.30)

온돌 난방은 건물의 구조에 일정한 제약을 준다. 아궁이에 불을 때 방바닥을 덥히므로 아궁이, 구들, 굴뚝의 순으로 수평이 높아져야 한다. 이에 아궁이의 위치는 기단의 높이와 연동하여 결정된다. 기단이 낮으면 아궁이는 땅을 파서 지면 아래에 설치해야 한다. 기단이 높으면 아궁이의 위치도 그만큼 높아진다.

조선 후기 궁궐 건축, 특히 민간의 상류주택과 규모와 평면이 비슷한 주거 건축에서는 대개 아궁이와 지면의 수평을 일치시켰다. 구들이나 아궁이에 물이 차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탄이나 소목(燒木)을 때기에 편리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에서 [그림 3]보듯 주춧돌은 대부분 60~90cm 정도의 기단 위에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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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창덕궁 관물헌(좌)과 석복헌(우)의 기단

그런데 성정각은 전면 처마 하부 기단의 높이가 25cm에 불과하다. 온돌을 시설하려면 지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해야 하는 구조이다. [그림 4]에 보이는 것처럼 현재 성정각의 아궁이는 지면에서 60cm 이상 낮게 설치되었다. 나아가 아궁이칸과 접하는 희우루 주초의 하부가 노출되어 있어 아궁이는 희우루가 지어진 뒤에 땅을 파서 설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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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성정각의 처마 하부 기단 높이(상)와 아궁이 위치(하좌) 및 아궁이칸의 주초 하부 노출 상태(하우)

이렇듯 성정각의 전면 처마 하부 기단이 낮고, 아궁이가 지면 아래에 있는 것은 이 건물을 창건할 당시에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거나, 시설했어도 현재와 같은 면적이나 구조는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금은 온돌방처럼 보이는 서쪽 끝 칸이 「동궐도형」에 ‘청(廳)’으로 표시된 것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그림 5]는 성정각 서쪽 끝 칸의 현재 모습과 「동궐도형」의 표기를 비교한 것이다. 지금은 온돌방처럼 보이지만 19세기 말에 작성된 「동궐도형」에는 ‘청(廳)으로 표기되어 있다. 동쪽의 두 칸만 ‘방(房)’으로 표기 하였다. 「동궐도형」이 제작된 19세기 말에 성정각은 동쪽 두 칸만 온돌방이었고 서쪽 두 칸은 마루 구조였다. 이처럼 낮은 기단, 지면보다 낮게 설치한 아궁이, 19세기 말까지 유지된 서쪽 끝 칸의 마루 구조를 종합하면 성정각을 창건할 때에는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거나 지금보다 제한적으로 시설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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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성정각 서쪽 칸의 현재 모습과 「동궐도형」의 ‘청(廳)’ 표시

(2) 창호의 양식-영쌍창

성정각은 창호의 양식에서도 조선 전기적 요소가 확인된다. 조선전기에는 창틀 중간에 기둥[영]을 설치한 ‘영쌍창’이 유행하였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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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성정각에 남아 있는 영쌍창

따라서 궁궐 건축에서 영쌍창이 발견되는 건물은 그렇지 않은 건물보다 건축 시기가 앞선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한도 내에서 성정각은 궁궐에서 영쌍창이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그림 6]에서 보듯 성정각의 배면에는 완전한 구조 의 영쌍창이 한 틀 남아 있다. 서쪽 칸 전면의 창틀 상부에도 영을 설치했던 흔적이 확인된다.32) 반면에 다른 창들은 크기와 창틀의 가구 기법이 유사하면서도 영의 흔적이 없다. 처음 지었을 때에 성정각의 모든 쌍창은 영쌍창이었을 것이다. 이후 영을 설치하지 않게 된 시기에 창틀을 수리하거나 교체한 결과 지금처럼 조선전기에 유행한 영쌍창틀과 이보다 늦은 시기의 창틀이 성정각에 공존하게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3) 희우루의 위치와 구조 및 상층부 진입 방식

현재 ‘루(樓)’는 한시적인 휴한이나 연회 등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상류 주택에 온돌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조선전기에는 주거용 누가 활발하게 건축되었고 이 누의 쓰임은 덥고 습한 계절에 집중되었다.33) 이러한 누는 휴한이나 오락용으로 건축된 누에 비해 주거에 적합한 요소가 강했다.

우선, 누의 위치를 들 수 있다. 휴한이나 오락을 위해 지었다면 살림 영역에서 떨어진 정원이나 야외에 자리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주거용이라면 살림 영역에 자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계절별 용도에 근거한 공간의 구분이다. 휴한이나 오락용으로 지었다면 쓰임은 여름에 집중될 것이며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1층을 틔우고 2층에 쓰임이 집중될 것이다. 반면에 주거용이라면 별동형인 경우 하층은 겨울용으로, 상층은 여름용으로 구획하고 시설할 것이다. 단층과 중층을 결합시켜 계절별로 쓰임을 배분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중층부의 상층에서 사생활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중층부의 하층도 벽이나 창호로 구획하는 것이 적절하다. 마지막으로 2층으로 진입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휴한이나 오락용이라면, 현존하는 사례들이 그렇듯, 사다리나 계단이 외부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주거용으로 지었다면 이동의 편의로움과 사생활 보호 등을 고려하여 계단이나 통로를 설치할 것이다.

희우루가 포함된 성정각은 위치부터 주거용에 적합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내전 영역과 인접해 있을뿐더러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희우루에 올라도 전망이 넓지 못하다. 계절에 따른 용도의 구분에서도 주거용에 적합하다. 단층과 중층 건물이 직교하는 구조일뿐더러 「동궐도」에서는 희우루의 아래층을 벽과 창호로 구획한 것이 확인된다([그림 9]). 현재 주초석과 기둥에도 벽과 창호의 흔적이 뚜렷하다. 과거에 성정각은 외부에 과시하는 외향성보다 사생활을 보호하는 내향성이 강한 건물이었다.

이처럼 성정각은 휴한이나 오락보다 주거에 적합한 요소가 강하다. 그런데 현재 단층부에서 희우루로 진입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림 7]에 보이는 것처럼 동쪽 방 안에 설치된 문을 통해 아궁이칸 상부의 다락으로 올라간 뒤 희우루로 진입하는 방식이 있다. 또 다른 방식은 아궁이칸 퇴칸에 설치된 나무 계단을 통해서 희우루로 진입하는 것이다. 전자는 내부에서 진입한다는 점에서 주거용에 적합하다. 후자는 외부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과시성이 강하고 휴한이나 오락용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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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실내 다락과 실외 퇴칸의 계단을 통한 희우루 진입 방식

그런데 목제 계단이 설치된 퇴칸의 현재 상태를 보면 목제 계단은 후대에 설치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림 8]에서 보듯 현재 목제 계단 하부의 퇴 공간에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희우루 아래층과 접하는 부분의 하방에는 툇마루 장선을 설치했던 홈이 대칭으로 나있어 툇마루가 여기까지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단층부와 희우루 아래층을 구획하는 판벽에는 쌍사를 새긴 문얼굴이 확인된다. 이로부터 이 문을 통하여 단층부와 희우루 하부를 왕래한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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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성정각 단층부와 중층부 마루와 문 흔적

이는 성정각을 처음 지었을 때에 희우루로 진입하는 방식은 단층부에서 실내 다락을 통하는 것이 유일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진입 방식은 주거의 편리와 사생활 보호에 적합하다. 희우루는 진입 방식에서도 조선전기적 요소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다.

3-2. 성정각의 원형 구조와 건축적 특징

(1) 1777년 수리 전과 수리 후 희우루의 구조

앞 절에서는 현존하는 성정각의 건축 양식과 구조를 살펴 조선 전기적 요소와 후기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적 요소를 제거하면 성정각을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에 가깝게 된다. 

우선, 온돌을 초창 이후에 시설하거나 확대, 개조한 것을 들 수 있다. 1장에서 성정각의 기단 높이와 아궁이 위치에 근거하여 초창 때에는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거나 제한적으로 시설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겨울철 세자의 학습과 관련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민진원이 말하기를…“요즘 날씨가 매우 추운데 왕세자(경종)께서 날마다 서연을 여니…지금 성정각은 매우 트이고 차서[疎冷] 추위를 무릅쓰고 (서연에) 임하면 감기에 걸릴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은…날씨가 조금 온화해진 때에 나와서 성정각에 임어하여…개강(開講)하게 하면…합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35)

위 인용문에서는 성정각이 ‘트이고 차서[疎冷]’ 세자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으니 겨울에는 성정각에서 서연을 열지 말자고 하였다. 성정각을 난방에 문제가 있는 건물로 여긴 것이다. 민진원의 건의가 있었던 1697년(숙종 23)은 이미 궁궐 건축에 온돌 난방이 보편화된 시기이다. ‘트이고 춥다’는 표현은 성정각에 온돌이 없거나 불완전함을 지적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1777년(정조 1)의 수리는 온돌 설치나 개조, 확대를 포함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정조가 성정각을 편의로운 정무 공간으로 애용한 것은 난방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의 온돌방과 정조 때의 온돌방은 차이가 있었다고 보인다. 현재는 동쪽 두 칸이 온돌방이지만 1777년의 수리에서는 희우루 하부에도 온돌을 시설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림 9]는 1817년(순조 17)에 제작된 「왕세자입학도첩」과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된 「동궐도」에 그려진 성정각이다. 입학도에서는 성정각 단층부의 정면을 4칸으로 그렸다.36) 아궁이칸을 제외하면 현재의 칸수와 동일하다. 이 중 동쪽 한 칸은 방으로 구획된 모습이고 서쪽 세 칸은 트인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중간의 두 칸은 기둥까지 생략하여 통합된 공간으로 나타냈다. 이렇게 그린 것은 동쪽 한 칸은 사적 성격이 강한 방인 반면, 서쪽 세 칸은 다수 인원이 참여하는 의례에 적합하도록 통합할 수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에도 두 칸으로 구성된 온돌방 중간에는 벽이나 분합으로 구획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동궐도」에서는 서쪽 두 칸의 전면에 띠살분합문을 그렸다. 외벽의 역할을 하는 분합문은 마루구조의 청에 설치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서쪽 두 칸이 청이었음을 알려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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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왕세자입학도첩」(좌)와 「동궐도」(우)의 성정각

나아가 현재 아궁이칸 동쪽면의 북쪽에는 폐기된 아궁이의 흔적이 있다([그림 4]). 이 아궁이에 불을 때면 희우루 하부를 덥히게 된다. 현재 희우루 하부에도 북쪽 두 칸을 벽이나 창호로 구획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따라서 1777년(정조 1)에 수리하면서 희우루 하부 에도 온돌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가능성은 희우루의 하층 창호에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확인된다.「동궐도」에서는 하층부의 동쪽창에 ‘향양용(嚮陽牗)’이라고 표기해 놓았다([그림 9 우]). 창호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특수한 사례이다. ‘햇빛을 향하는 들창’이라는 뜻의 이름이 「동궐도」에 표기된 것은 희우루 하부가 부수적인 공간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궁궐에서 우아한 한자 명칭은 국왕이 짓거나 왕명으로 짓는다는 점에서 ‘향양용’은 국왕의 뜻이 담긴 명칭일 가능성이 크다. 국왕이 희우루 하부의 온돌방에 자주 거처했고, 동쪽 창에서 비쳐드는 햇살에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38) 그러므로 1777년에 희우루 하부에도 온돌을 시설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왕세자입학도」와 「동궐도」, 「동궐도형」을 종 합하여 1777년에 수리된 성정각의 평면을 나타내면 (그림 10)과 같다. 정조 때에 단층부 두 칸에 온돌을 설치하였고, 서쪽 두 칸은 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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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1777년 수리 직후의 성정각 평면 추정

그리고 처음 지어진 성정각의 방 부분에는 조선전기양식의 영쌍창을 설치했을 것이다. 청에는 분합문을 달았을 것이며, 이 청과 방 사이에도 분합문을 달았을 것이다. 퇴칸에는 「동궐도」에 보이는 양식의 난간을 설치했을 것이다.39) 처음 지어진 성정각의 원형을 추정하여 입체적으로 도시하면 [그림 11]과 같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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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초창된 성정각의 입체 가구 추정

(2) 초창시 성정각의 건축 관념과 건축 구조

성정각은 지금도 조선전기의 건축 요소를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초창 때에는 희우루를 포함한 성정각 전체에 조선전기에 유행했던 건축 관념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구조면에서 현재의 성정각이 조선후기 주거 건축과 비교되는 가장 큰 특징은 단층과 중층이 결합된 구조라는 점이다. 조선후기에도 누마루를 돌출시 킨 경우가 있지만 사례가 많지 않으며, 성정각처럼 완전한 중층이 단층과 일체형으로 결합된 구조는 극히 드물다.41) 그런데 조선전기 기록에서는 ‘침루’나 ‘누침실’ 등의 용례들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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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 1]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침루(寢樓)’와 ‘누침(樓寢)’의 용례를 추출한 것이다. ‘누침전’이나 ‘누침실’은 경복궁, 창덕궁, 수강궁(창경궁), 연희궁에 있었다. 모든 궁궐에 침실용 누가 건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조선전기 궁궐 건축에서 ‘침루’가 예외적인 건축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1487년(성종 9)의 사례는 이를 더욱 잘 보여준다.

1487년의 ‘침루’는 주택의 칸수를 제한하는 규정에서 언급되었다. 대군의 집은 ‘정방 익랑 서청 침루로 구성되는 건축 칸수를 12칸으로 정하였다. 누의 기둥은 영조척 15척으로 규정하였다.42) 이러한 규정은 대군의 집에 침실 용도의 누를 짓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알려준다. 누 기둥의 높이를 4.5m 정도로 제한한 것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높은 경우가 많았으며, 침루가 하층도 별도의 공간으로 구획할 수 있을 만큼 높았음을 알려준다. 하부를 벽이나 창호로 막은 ‘층루’를 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487년의 규정에서 ‘군(君) 공주’ 이하의 주택에 대해서는 ‘침루’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누주(樓柱)’의 높이를 서인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14척에서 11척까지 규정하였다. 이로부터 ‘침루’ 건축은 신분이 아니라 경제력이 관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침루’는 보편적인 건축 관념이자 실재하는 건축 유형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침루’는 ‘내루(內樓)’로도 표현되었다.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에서는 대군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내루’의 칸수를 규정하였다. 이 또한 중층 건물을 배치하는 것이 15세기 상류 주거 건축의 보편적인 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에서는 핵심 건물을 ‘정침·익랑·서청·내루’로 표현하여,43) 성종 때 규정에 보이는 ‘정방 익랑 서청 침루’의 ‘침루’가 세종 때 규정의 ‘내루’와 같은 개념임을 알려준다. ‘침루’는 용도에 근거한 표현이고, ‘내루’는 위치에 근거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침실의 역할을 한 ‘침루’는 곧 살림 영역에 위치한 ‘내루’였던 것이다.

층루 구조의 침루 내루는 제안대군 저택의 침루에 대한 1482년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제안대군 부인이 누침실에서 자고 있을 때 누 아래에서 제안대군 부인의 추문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하였다. 제안대군 부인은 아침에 깨어서 누 아래에서 조사하는 소리를 들었다.44) 이와 같은 기록은 제안대군 저택의 침루가 상층은 침실이었고, 하층도 벽과 창호로 구획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표 1]에서 침루의 존재를 알려주는 궁궐의 사례들은 ‘누침전 누침실’로만 표현했을 뿐 건물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궁궐에서 국왕이 거처하는 건물은 이름이 부여되었다. 조선전기 궁궐의 별동형 층루들도 고유한 이름을 지녔다. 창덕궁의 징광루와 광연루, 경복궁의 청연루처럼 상 하층 모두를 구획하여 집무나 취침용으로 사용한 층루들이 확인된다.45)

국왕이 취침하는 곳인데도 단지 ‘누침실’로 표현한 사례들은 이 부분에 고유한 이름이 없거나 있어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는 이들 침루가 별동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단일 건물의 일부분을 구성했음을 시사한다. 단층 부분과 ‘침루’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구조였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조선전기 기록에서 추론되는 이와 같은 구조는 17세기 전반에 건축된 대군 저택을 그린 그림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림 12]는 인조의 아들인 효령대군(효종)과 인평대군 저택의 층루이다. 효령대군 저택의 조양루와 인평대군 저택의 석양루에서는 공통점이 확인된다. 첫째, 두 건물 모두 상층과 하층을 벽과 창호로 구획하여 하층이 독립적인 용도를 지니면서 상층에서 이루어지는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다. 둘째, 통로 역할을 하는 보조 건물을 매개로 단층 건물과 층루가 연결되어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상시적이고 임의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셋째, 두 층루 모두 핵심 주거영역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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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17세기 전반 대군 저택의 조양루(좌)와 석양루(우)

[그림 13] 에서 보듯 인평대군 저택의 대문에서 석양루에 도달하려면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했다. 석양루가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내밀한 주거 영역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조양루의 배치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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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인평대군 저택 대문에서 석양루까지의 동선

17세기 전반은 조선전기의 건축 법식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유지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대군 저택의 살림영역에 지어진, 단층과 결합된 층루는 조선전기의 법식을 따른 건축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전기의 건축 관념이 반영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전기에 이러한 층루는 관용적으로 ‘침루 내루’라고 불렸으며, 상층의 특화된 기능은 ‘침실’이었다. 습하고 더운 계절의 수면에 적합하도록 구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겨울용 침실은 단층부에 있었지만, 단층부는 침실 이외에도 주거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기에 단층부를 구별하여 표현하는 관용적인 표현은 성립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단층부와 ‘침루’가 결합하고 매개 공간을 통하여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단층부에서 중층부 상층으로 진입하는 구조는 현재의 성정각과 일치한다. 성정각의 일부를 구성하는 중층부가 ‘침루’에 해당하고, 본래 보춘루였고, 현재 희우루인 상층 부분이 ‘누침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희우루는 본래 하층 부분도 벽과 창호로 구획된 ‘층루’였다. 단층부와 희우루를 연결하는 진입구는 실내에 설치되었으며, 현재 아궁이칸 상부의 다락은 매개 공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성정각은 조선후기 건축이지만, 층루형 ‘침루’가 포함된, 조선전기 궁궐과 상류 주택에서 유행한 건축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4. 결론

성정각은 창덕궁의 현존 건물 중에서 초창 시기가 매우 오랠뿐더러 조선전기적인 건축 양식과 구조를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 성정각은 1665년에 현종이 어린 세자(숙종)를 위해 ‘강학청’을 설치했을 때부터 원자나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이라고 판단된다. 이를 계기로 ‘강학청’으로 불리다가 숙종이 ‘성정각’으로 명명하면서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의 건축 이력을 고려하면 성정각은 1620년 이전에 지은 인경궁에서 옮겨 왔거나 1645년에 인조가 새로 지은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성정각은 처마 하부 기단이 낮고, 땅을 파서 지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한 것으로 미루어 초창 때에는 온돌을 시설하지 않았거나, 온돌의 구조나 면적이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창틀 중간에 기둥을 설치한 영쌍창이 남아 있다. 온돌의 제한적인 설치는 조선전기 궁궐 난방의 뚜렷한 특징이고, 영쌍창도 조선전기에 유행한 창호 양식이다. 성정각의 중층부인 희우루의 위치와 구조 및 상층부 진입 방식 역시 희우루에 조선전기 주거용 중층 건축의 구조와 용도를 적 용할 수 있게 한다.

「왕세자입학도첩」과 「동궐도」, 「동궐도형」에 그려진 성정각은 1777년(정조 1)에 수리한 결과이다. 이때에 단층부 동쪽 두 칸과 중층부 하부에 온돌을 시설했다고 생각된다. 정조는 수리된 성정각을 일상적인 집무처로 애용하였다.

그러므로 1777년 수리 이전의 성정각은 조선전기의 건축 관념이 적용되었고, 그 관념에 따라 도출된 건축 구조에 속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건축 관념은 건물의 내부 공간을 계절별로 용도를 특화시켜 구획하는 것이다. 건축 구조는 단층부와 중층부를 결합하고, 중층부 상층을 덥고 습한 계절에 적합하게 구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전기 궁궐 및 왕자 저택과 관련된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기록에서는 중층부를 ‘침루 내루’로, 침루의 상층을 ‘누침실’로 불렀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17세기 전반 건축인 봉림대군의 저택과 인평대군의 저택을 그린 회화 자료에서는 이와 같은 건축 관념이 적용된 침루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현재 시점에서 성정각은 특이한 구조의 조선후기 건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계층이나 신분에 따른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국왕부터 부유한 서인에 이르기까지 상류 주거 건축에서 드물지 않은 구조였다. 성정각은 조선후기에 건축되었지만, 조선전기에 유행한 건축 관념과 건축 양식이 적용된 건물이라는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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